반응형
[ 펼치기 · 접기 ]
|
상징
|
|
정치
|
|
군사
|
|
치안
|
|
경제
|
|
인문
|
|
역사
|
역사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굴라크 ·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신경제정책 · 대숙청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대조국전쟁(독소전) · 냉전(6.25 전쟁 · 스푸트니크 쇼크 · 베트남 전쟁 · 중월전쟁 · 쿠바 미사일 위기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소련 존속 여부 국민투표 · 8월 쿠데타 · 소련 해체
|
외교
|
|
문화
|
|
우주
|
|
소련 관련 틀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전쟁
|
교전국
|
||
봉소전쟁
1929 |
|||
스페인 내전
1936 ~ 1939 |
|||
소련-일본 국경분쟁
1938 ~ 1939 |
|||
하산 호 전투
1938 |
|||
할힌골 전투
1939 |
|||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
폴란드 침공
1939 |
|||
겨울전쟁
1939 ~ 1940 |
|||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침공
1940 |
|||
발트 3국 점령
1940 |
|||
대조국전쟁
1941 ~ 1945 |
|||
계속전쟁
1941 ~ 1944 |
|||
페르시아 침공
1941 |
|||
소련-일본 전쟁
1945 |
|||
그리스 내전
1944 ~ 1948 |
그리스 왕국 |
||
6.25 전쟁
1950 ~ 1953 |
|||
1953년 동독 봉기
1953 |
|||
라제즈드노이호 사건
1953 |
|||
헝가리 혁명
1956 |
|||
U-2 격추 사건
1960 |
|||
베트남 전쟁
1960 ~ 1975 |
|||
프라하의 봄
1968 |
|||
소련-중국 국경분쟁
1969 |
|||
앙골라 내전
1975 ~ 1991 |
|||
오가덴 전쟁
1977 ~ 1978 |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 ~ 1989 |
|||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1988 ~ 1994 |
|||
|
[ 펼치기 · 접기 ]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2]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
|
|
|
국기
|
국장
|
|
상징
|
||
국가
|
||
국화
|
||
위치
|
||
|
||
연방 성립 이전
|
연방 해체 이후
|
|
지리
|
||
[ 펼치기 · 접기 ]
|
||
인문 환경
|
||
[ 펼치기 · 접기 ]
|
||
정치
|
||
[ 펼치기 · 접기 ]
|
||
경제
|
||
[ 펼치기 · 접기 ]
|
||
외교
|
||
[ 펼치기 · 접기 ]
|
||
.su[12]
|
||
국가코드
|
||
SU[13], SUN, 810
|
||
국제 전화 코드
|
||
+7[14]
|
영역
|
||
수도
|
||
면적
|
22,402,200km²
|
|
접경국[A]
|
인구
|
286,730,819명(1989년) | 세계 3위
|
|
민족
|
러시아인 51%, 우크라이나인 15%, 우즈베크인 6% 등
|
|
언어
|
||
없음(국가 무신론)
|
||
군대
|
정치 체제
|
||
국가원수
|
최고회의 주석(서기장)[9] → 대통령
|
|
정부수반
|
장관회의 주석 → 국무총리
|
|
역대
최고지도자 |
||
여당
|
경제 체제
|
||
GDP
(명목) |
$ 2조 2000억(1985년, 추정치) | 세계 2위
|
|
1인당 GDP
|
$ 2,736(1990년)[11]
|
|
통화
|
소련 루블 (руб.)
|
1. 개요[편집]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15]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16](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약칭 소련(蘇聯)은 20세기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건국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17]로, 냉전 시절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건국 69주년이 되기 나흘 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km²)[18]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1989년 기준 286,730,819명)[19]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20],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21]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건국 69주년이 되기 나흘 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km²)[18]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1989년 기준 286,730,819명)[19]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20],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21]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
[ 펼치기 · 접기 ]
|
2.2. 국기[편집]
2.3. 국장[편집]
2.4. 국가[편집]
소련의 국가는 총 2가지가 있다.
3. 역사[편집]
4. 지리[편집]
소련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의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호주의 2.9배, 브라질의 2.6배, 캐나다, 미국, 중국의 2.3배 정도가 더 넓은 나라였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76%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역사상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28] 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여 남아메리카보다 컸으며 북아메리카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었으나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29]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30],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튀르키예,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31] 파키스탄과도 와칸 회랑을 두고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과도 쿠릴 열도 방면에서 매우 가까웠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대신,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지만[32],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으로, 높이는 무려 7,495m인데 세계 50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50위라고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단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5. 인문환경[편집]
5.1. 인구[편집]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33]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 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 명), 우즈베크인(1,670만 명), 벨라루스인(1,004만 명), 카자흐인(814만 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34]도 각각 204만 명, 138만 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 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33]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 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 명), 우즈베크인(1,670만 명), 벨라루스인(1,004만 명), 카자흐인(814만 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34]도 각각 204만 명, 138만 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 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5.2. 언어[편집]
5.3. 종교[편집]
5.4. 교통[편집]
소련은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었다.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다. 1985년 기준으로 인구 100명 당 5대로 가구당으로 치면 4가구당 1대에 그쳤다. 물론 당시 한국보다는 자동차 보급률이 훨씬 높았기는 했지만, 소련의 경쟁국이였던 미국이 이미 1920년대에 중산층이 자동차를 굴리던게 당연시되었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자동차에 있어서는 서방 국가들보다 열세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던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서방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동차 제작 기술 수준이 낙후되었고, 민간 승용차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동차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까지 보통 승용차는 주로 관용차로 쓰이던 시절이었고, 일반인들이 몰 수 있는 차량은 콜호즈나 지역 사업체 소속 화물차 같은 차량이 대다수였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등 지도자들이 민간경제 개선 차원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판매가 허가되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 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차를 구매한 사람도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현찰로 낸 다음에 몇년씩 기다려서 받았다. 따라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초기 때는 자동차 면허를 가진 사람도 차를 필요할때 대여해서 썼기 때문에 렌트카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후 1970년 소련이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피아트 124를 기반으로 한 라다 쥐굴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기면서 개인용 승용차의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자동차 수요를 다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으로 자동차를 사려면 몇년씩 대기해야되는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생산량을 늘렸음에도 장시간 대기문제로 불만이 커져나가면서, 페레스트로이카기인 1985년에 외제 중고차의 수입이 허가되었다. 코메콘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동독 트라반트와 체코슬로바키아 스코다, 유고슬라비아 자스타바 코랄을 비롯한 동유럽산 외제 중고차들이 소련 전역에 공급되면서 자동차 보급률도 급속히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13대, 가구당으로 치면 2가구당 1대 수준이었다.
자동차 가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제츠는 일반인의 1~2년치 봉급 수준이었다.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35]
사실 소련은 생활비가 낮고 평균 저축률이 높아 소비패턴만 보면 최소한 1970년대에 1가구 1대를 기록한 일본과 비슷하게 자동차가 대중화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36] 그럼에도 자동차 생산량이 수요량보다 부족하다 보니 재고가 없어 신청을 한 뒤 몇 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에다가 수입차는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제외하면 수입이 제한되어있었고, 공산권에서 생산된 차라도 중고차는 1985년 이전까지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이렇게 국산차로는 수요를 벌충하기에 모자랐고 수입차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었으니 자가용 자동차의 보급률이 그에 비례해 떨어졌다.[37] 이러다보니 사회초년생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사회초년생들은 수령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쉽게 사서 탈 수 있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8]따라서 차를 빨리 구하고 싶은 사람은 보통 중고차를 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39]
그러나 오토바이는 비교적 일찍부터 대중화되어서 서민들의 보편적인 교통수단으로 취급받았고, 노면전차나 지하철, 무궤도 전차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또는 별장을 오갈 때나 여행을 갈 때에도 버스를 전세 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에는 도로망 부실도 적잖은 요인을 차지했다. 소련은 지리상 여건이나 기반시설 유지보수비용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도로교통에 있어 자동차보다 철도교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철도 노선에 주기적으로 투자한 데 반하여 라스푸티차나 부란같은 기후 특성으로 인해 적잖은 유지보수비와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전국적인 도로망 구축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40] 그래서 대도시에서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도 비포장길이 수백km씩 이어지는 풍경을 쉽게 볼수있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통제를 중요시한 소련 입장에서 개인의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중심이 되는 도로교통보다는 철도교통이 통제하기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 당장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 지라도, 장기적으로 물류유통체계를 낙후시키는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소련 내내 이어진 만성적인 물자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떨어진 반대 급부로 철도망은 크게 발전했으며, 도시철도망은 매우 발달되었다. 특히 노면전차망은 매우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서방국가에서 노면전차를 자동차 통행에 방해된다는 잇따라 폐선하는 동안 왠만한 중소도시에서도 노면전차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지하철도 활발히 건설되었으며, 지하철은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각 공화국 수도를 중심으로 건설했다. 이 결과 발트 3국[41]과 일부 중앙아시아 지역 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공화국 수도에는 전철이 건설되었는데, 사실 소련의 구성 공화국은 15개였다. 그말인 즉슨 핵심도시와 공화국 수도 위주로 지어도 15개는 있어야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핵전쟁을 고려해 지하철을 깊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건설속도는 서방국가들에 비해 빠르기는 했어도 현대의 중국지하철과 인도지하철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순위로 밀려난 지하철망도 상당수 있었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재정난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거나 뒤늦게 개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시기 건축된 대표적인 지하철로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레닌그라드 지하철, 키예프 지하철, 타슈켄트 지하철, 민스크 지하철, 하르코프 지하철등이 있다. 다만 고속철도망의 발달은 느렸다. 소련에서 고속철도의 필요성을 인지해서 1984년에 ER-200라는 고속철도 자체는 개통되었기는 했으나, 기존선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이었고, 차량을 대량으로 양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 전역의 대도시에 투입되지 못하여 모스크바-레닌그라드에서 운행하는 정도에 그쳤으며 그나마 운행편수도 1주 1왕복에 그쳤다. ER-200은 2000년대까지 운행되었지만, 2000년대에 삽산으로 교체되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프로시욥이라는 고속철도를 개통하게 된다. 물론 구소련 나머지 국가들의 고속철도망 개통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건 덤이다.
항공의 경우 소련 민간항공부가 아에로플로트라는 이름으로 소련 전역의 민간항공노선을 관리하여 운영했다. 당시 국토가 넓었고, 포장도로를 깔기 쉽지 않은 오지대가 많던 소련 특성 상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항공교통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항공기 값이 너무 비싸서 지위가 있던 사람들이나 오지 거주자들이 주요도시로 드나들때 이용하던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후 항공기 표값인하 및 제트기 보급으로 1960년대부터 대중교통 수단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는 노선은 정치적 망명 등을 고려하여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고, 1달에 1번꼴로 사고가 일어났을 정도로 항공사고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기 때문에, 철도 이용률이 여전히 높았다.
6. 행정구역
소련은 국명으로나 헌법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합 체제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43] 소련이라는 국가연합에 15개의 국가들이 가맹해 있는 체제였다.[44]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아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47],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 영역은 독립국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48]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49]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그 설마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6.1. 구성국[편집]
[ 펼치기 · 접기 ]
|
-
|
|||||
#
|
국명
|
수도
|
인구 (1989)
|
면적 (1991)
|
1
|
147,386,000
|
17,075,400
|
||
2
|
51,706,746
|
603,700
|
||
3
|
10,151,806
|
207,600
|
||
4
|
19,906,000
|
447,400
|
||
5
|
16,711,900
|
2,717,300
|
||
6
|
5,400,841
|
69,700
|
||
7
|
7,037,900
|
86,600
|
||
8
|
3,689,779
|
65,200
|
||
9
|
4,337,600
|
33,843
|
||
10
|
2,666,567
|
64,589
|
||
11
|
4,257,800
|
198,500
|
||
12
|
5,112,000
|
143,100
|
||
13
|
3,287,700
|
29,800
|
||
14
|
3,522,700
|
488,100
|
||
15
|
1,565,662
|
45,226
|
러시아 뒤에 붙는 SFSR과 구성국들의 뒤에 붙는 SSR은 각각 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Soviet Socialist Republic(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약자이다.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SFSR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SSR,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1936 재정된 소련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에 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러시아가 소련의 유일한 SFSR로 남았다.
사실 소련의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일반적인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국가간 연합 체제의 성격도 있었으므로, 산하에 연방 국가가 가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소련을 '연방제' 국가로 볼 경우에는 연방 국가 산하에 또 연방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64]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연도
|
역사
|
1922년 12월
|
|
1924년 12월
|
(신설) 우즈베크
|
1925년 05월
|
(신설) 투르크멘
|
1929년 12월
|
(신설) 타지크
|
1936년 12월
|
|
1940년 03월
|
(신설) 카렐리야-핀란드
|
1940년 08월
|
|
1954년 03월
|
|
1956년 07월
|
|
1991년 09월
|
|
1991년 12월
|
그 밖에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공화국들은 다음과 같다.
-
극동 공화국 (1920~1922)
-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1924)
-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22)
-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36)
-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
-
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1924)
-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
-
오데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
-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1918)
-
트란스니스트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67]
-
타타르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 [68]
6.2. 자치구역[편집]
소련의 자치구역 (자치공화국(ASSR) / 자치주(AO)[69]
|
||
소속
|
구역명
|
국명
|
자치공화국
|
||
자치주
|
유대인 자치주
|
|
자치공화국
|
||
자치주
|
남오세티야
|
|
자치공화국
|
||
자치주
|
||
자치공화국
|
||
자치주
|
고르노-바다흐샨
|
헌법에 따라 구성국(SFSR/SSR)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나 캅카스 지역처럼 민족 구성이 복잡한 공화국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구성국과 자치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공용어나 헌법,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자치구역은 소속국이나 소속지역의 행정을 따르면서 일정 수준 재량권을 가진 지방에 가까웠다. 즉, 이론 상으로는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을 구성하는 구성국(SFSR, SSR 등)과 구성국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주(Oblast, Krai 등)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1922년 소련 건국 초창기, 소련은 당시 비러시아계 민족에게 영토별로 민족국가(Nation)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소련 각지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당시 민족별 거주지를 행정구역 경계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 영토(대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당시 행정당국의 편의대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처럼 잠재적 적국과 연관되어 있거나 체첸인같이 당국에 반항적인 성향의 소수민족을 고의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켜 당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이 때 고려인 강제 이주도 이러한 맥락으로 시행되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대다수 자치구역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행정편의상 이유로 경계를 결정했고, 민족 분포를 고려했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 이주로 민족 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80]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6.3. 주요 도시[편집]
순위
|
공화국
|
도시
|
인구 (1989년)
|
1
|
8,769,117명
|
||
2
|
5,023,506명
|
||
3
|
2,600,000명
|
||
4
|
2,136,600명
|
||
5
|
1,794,874명
|
||
6
|
1,607,000명
|
||
7
|
1,593,970명
|
||
8
|
1,438,133명
|
||
9
|
1,436,516명
|
||
10
|
1,364,621명
|
13. 대중매체에서[편집]
냉전 시절 제작된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제작된 매체에서는 냉전기가 배경이라도 소련을 좀 더 비중있거나 입체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주인공 또는 선역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탈린 시기 독재나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면모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주인공 또는 선역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탈린 시기 독재나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면모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13.1. 영화[편집]
반응형
'문화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0) | 2024.07.25 |
---|---|
소비에트 연방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11) | 2024.07.25 |
국호 국가명칭 나라이름 개명한 사례 모음 (0) | 2024.02.25 |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탑 3위 (0) | 2024.02.15 |
한국 대학교의 전신 목록 (1) | 202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