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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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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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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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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1988 ~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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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2]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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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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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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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13], SUN,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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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전화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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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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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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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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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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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02,200km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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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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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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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730,819명(1989년) | 세계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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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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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 51%, 우크라이나인 15%, 우즈베크인 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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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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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국가 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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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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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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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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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 주석(서기장)[9] →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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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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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회의 주석 →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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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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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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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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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명목) |
$ 2조 2000억(1985년, 추정치) | 세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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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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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6(1990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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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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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루블 (ру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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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15]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16](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약칭 소련(蘇聯)은 20세기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건국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17]로, 냉전 시절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건국 69주년이 되기 나흘 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km²)[18]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1989년 기준 286,730,819명)[19]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20],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21]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건국 69주년이 되기 나흘 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붕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22,402,200km²)[18]와 세 번째로 많은 인구(1989년 기준 286,730,819명)[19]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20],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21]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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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국기[편집]
2.3. 국장[편집]
2.4. 국가[편집]
소련의 국가는 총 2가지가 있다.
3. 역사[편집]
4. 지리[편집]
소련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의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호주의 2.9배, 브라질의 2.6배, 캐나다, 미국, 중국의 2.3배 정도가 더 넓은 나라였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76%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역사상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28] 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여 남아메리카보다 컸으며 북아메리카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었으나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29]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30],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튀르키예,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31] 파키스탄과도 와칸 회랑을 두고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과도 쿠릴 열도 방면에서 매우 가까웠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대신,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지만[32],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으로, 높이는 무려 7,495m인데 세계 50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50위라고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단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5. 인문환경[편집]
5.1. 인구[편집]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33]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 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 명), 우즈베크인(1,670만 명), 벨라루스인(1,004만 명), 카자흐인(814만 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34]도 각각 204만 명, 138만 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 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33]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 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 명), 우즈베크인(1,670만 명), 벨라루스인(1,004만 명), 카자흐인(814만 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34]도 각각 204만 명, 138만 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 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5.2. 언어[편집]
5.3. 종교[편집]
5.4. 교통[편집]
소련은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었다.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다. 1985년 기준으로 인구 100명 당 5대로 가구당으로 치면 4가구당 1대에 그쳤다. 물론 당시 한국보다는 자동차 보급률이 훨씬 높았기는 했지만, 소련의 경쟁국이였던 미국이 이미 1920년대에 중산층이 자동차를 굴리던게 당연시되었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자동차에 있어서는 서방 국가들보다 열세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던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서방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동차 제작 기술 수준이 낙후되었고, 민간 승용차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자동차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까지 보통 승용차는 주로 관용차로 쓰이던 시절이었고, 일반인들이 몰 수 있는 차량은 콜호즈나 지역 사업체 소속 화물차 같은 차량이 대다수였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등 지도자들이 민간경제 개선 차원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판매가 허가되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 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차를 구매한 사람도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현찰로 낸 다음에 몇년씩 기다려서 받았다. 따라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초기 때는 자동차 면허를 가진 사람도 차를 필요할때 대여해서 썼기 때문에 렌트카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후 1970년 소련이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피아트 124를 기반으로 한 라다 쥐굴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기면서 개인용 승용차의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자동차 수요를 다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으로 자동차를 사려면 몇년씩 대기해야되는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생산량을 늘렸음에도 장시간 대기문제로 불만이 커져나가면서, 페레스트로이카기인 1985년에 외제 중고차의 수입이 허가되었다. 코메콘이 존재하던 시절에는 동독 트라반트와 체코슬로바키아 스코다, 유고슬라비아 자스타바 코랄을 비롯한 동유럽산 외제 중고차들이 소련 전역에 공급되면서 자동차 보급률도 급속히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13대, 가구당으로 치면 2가구당 1대 수준이었다.
자동차 가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제츠는 일반인의 1~2년치 봉급 수준이었다.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35]
사실 소련은 생활비가 낮고 평균 저축률이 높아 소비패턴만 보면 최소한 1970년대에 1가구 1대를 기록한 일본과 비슷하게 자동차가 대중화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36] 그럼에도 자동차 생산량이 수요량보다 부족하다 보니 재고가 없어 신청을 한 뒤 몇 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에다가 수입차는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제외하면 수입이 제한되어있었고, 공산권에서 생산된 차라도 중고차는 1985년 이전까지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이렇게 국산차로는 수요를 벌충하기에 모자랐고 수입차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었으니 자가용 자동차의 보급률이 그에 비례해 떨어졌다.[37] 이러다보니 사회초년생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사회초년생들은 수령하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자동차를 사는 것보다 쉽게 사서 탈 수 있는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8]따라서 차를 빨리 구하고 싶은 사람은 보통 중고차를 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39]
그러나 오토바이는 비교적 일찍부터 대중화되어서 서민들의 보편적인 교통수단으로 취급받았고, 노면전차나 지하철, 무궤도 전차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또는 별장을 오갈 때나 여행을 갈 때에도 버스를 전세 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에는 도로망 부실도 적잖은 요인을 차지했다. 소련은 지리상 여건이나 기반시설 유지보수비용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도로교통에 있어 자동차보다 철도교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철도 노선에 주기적으로 투자한 데 반하여 라스푸티차나 부란같은 기후 특성으로 인해 적잖은 유지보수비와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전국적인 도로망 구축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40] 그래서 대도시에서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도 비포장길이 수백km씩 이어지는 풍경을 쉽게 볼수있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통제를 중요시한 소련 입장에서 개인의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중심이 되는 도로교통보다는 철도교통이 통제하기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 당장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 지라도, 장기적으로 물류유통체계를 낙후시키는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소련 내내 이어진 만성적인 물자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떨어진 반대 급부로 철도망은 크게 발전했으며, 도시철도망은 매우 발달되었다. 특히 노면전차망은 매우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서방국가에서 노면전차를 자동차 통행에 방해된다는 잇따라 폐선하는 동안 왠만한 중소도시에서도 노면전차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지하철도 활발히 건설되었으며, 지하철은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각 공화국 수도를 중심으로 건설했다. 이 결과 발트 3국[41]과 일부 중앙아시아 지역 공화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공화국 수도에는 전철이 건설되었는데, 사실 소련의 구성 공화국은 15개였다. 그말인 즉슨 핵심도시와 공화국 수도 위주로 지어도 15개는 있어야 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핵전쟁을 고려해 지하철을 깊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건설속도는 서방국가들에 비해 빠르기는 했어도 현대의 중국지하철과 인도지하철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후순위로 밀려난 지하철망도 상당수 있었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재정난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거나 뒤늦게 개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시기 건축된 대표적인 지하철로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레닌그라드 지하철, 키예프 지하철, 타슈켄트 지하철, 민스크 지하철, 하르코프 지하철등이 있다. 다만 고속철도망의 발달은 느렸다. 소련에서 고속철도의 필요성을 인지해서 1984년에 ER-200라는 고속철도 자체는 개통되었기는 했으나, 기존선을 그대로 이용하는 방식이었고, 차량을 대량으로 양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 전역의 대도시에 투입되지 못하여 모스크바-레닌그라드에서 운행하는 정도에 그쳤으며 그나마 운행편수도 1주 1왕복에 그쳤다. ER-200은 2000년대까지 운행되었지만, 2000년대에 삽산으로 교체되었고,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프로시욥이라는 고속철도를 개통하게 된다. 물론 구소련 나머지 국가들의 고속철도망 개통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인 건 덤이다.
항공의 경우 소련 민간항공부가 아에로플로트라는 이름으로 소련 전역의 민간항공노선을 관리하여 운영했다. 당시 국토가 넓었고, 포장도로를 깔기 쉽지 않은 오지대가 많던 소련 특성 상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항공교통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항공기 값이 너무 비싸서 지위가 있던 사람들이나 오지 거주자들이 주요도시로 드나들때 이용하던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후 항공기 표값인하 및 제트기 보급으로 1960년대부터 대중교통 수단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는 노선은 정치적 망명 등을 고려하여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고, 1달에 1번꼴로 사고가 일어났을 정도로 항공사고가 심심치 않게 벌어졌기 때문에, 철도 이용률이 여전히 높았다.
6. 행정구역
소련은 국명으로나 헌법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합 체제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43] 소련이라는 국가연합에 15개의 국가들이 가맹해 있는 체제였다.[44]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아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47],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 영역은 독립국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48]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49]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그 설마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6.1. 구성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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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국명
|
수도
|
인구 (1989)
|
면적 (1991)
|
1
|
147,386,000
|
17,075,400
|
||
2
|
51,706,746
|
603,700
|
||
3
|
10,151,806
|
207,600
|
||
4
|
19,906,000
|
447,400
|
||
5
|
16,711,900
|
2,717,300
|
||
6
|
5,400,841
|
69,700
|
||
7
|
7,037,900
|
86,600
|
||
8
|
3,689,779
|
65,200
|
||
9
|
4,337,600
|
33,843
|
||
10
|
2,666,567
|
64,589
|
||
11
|
4,257,800
|
198,500
|
||
12
|
5,112,000
|
143,100
|
||
13
|
3,287,700
|
29,800
|
||
14
|
3,52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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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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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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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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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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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뒤에 붙는 SFSR과 구성국들의 뒤에 붙는 SSR은 각각 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Soviet Socialist Republic(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약자이다.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SFSR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SSR,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1936 재정된 소련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에 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러시아가 소련의 유일한 SFSR로 남았다.
사실 소련의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일반적인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국가간 연합 체제의 성격도 있었으므로, 산하에 연방 국가가 가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소련을 '연방제' 국가로 볼 경우에는 연방 국가 산하에 또 연방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64]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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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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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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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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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 우즈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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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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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 투르크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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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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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 타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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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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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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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 카렐리야-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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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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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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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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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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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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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공화국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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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공화국 (19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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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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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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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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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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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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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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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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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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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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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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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니스트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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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 [68]
6.2. 자치구역[편집]
소련의 자치구역 (자치공화국(ASSR) / 자치주(AO)[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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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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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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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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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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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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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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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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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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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오세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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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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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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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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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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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노-바다흐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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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따라 구성국(SFSR/SSR)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나 캅카스 지역처럼 민족 구성이 복잡한 공화국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구성국과 자치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공용어나 헌법,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자치구역은 소속국이나 소속지역의 행정을 따르면서 일정 수준 재량권을 가진 지방에 가까웠다. 즉, 이론 상으로는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을 구성하는 구성국(SFSR, SSR 등)과 구성국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주(Oblast, Krai 등)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1922년 소련 건국 초창기, 소련은 당시 비러시아계 민족에게 영토별로 민족국가(Nation)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소련 각지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당시 민족별 거주지를 행정구역 경계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 영토(대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당시 행정당국의 편의대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처럼 잠재적 적국과 연관되어 있거나 체첸인같이 당국에 반항적인 성향의 소수민족을 고의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켜 당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이 때 고려인 강제 이주도 이러한 맥락으로 시행되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대다수 자치구역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행정편의상 이유로 경계를 결정했고, 민족 분포를 고려했다고 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 이주로 민족 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80]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6.3. 주요 도시[편집]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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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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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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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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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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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9,11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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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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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3,50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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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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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000명
|
||
4
|
2,136,6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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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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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4,874명
|
||
6
|
1,607,000명
|
||
7
|
1,593,970명
|
||
8
|
1,438,133명
|
||
9
|
1,436,516명
|
||
10
|
1,364,62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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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치[편집]
소련은 헌법 상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지만 실제로는 일당제 중앙집권국가에 가까웠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을 거치면서 극도로 전체주의적이면서도 파시즘적인 면모를 띄게 되었고, 이러한 통치시스템은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후 북한 (김일성)이나 알바니아 (엔베르 호자),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같은 사회주의 1인독재국가를 형성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내세우면서 소련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1인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지속된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중국과 북한, 쿠바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당제 정치체계의 기반을 확립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내세우면서 소련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1인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지속된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중국과 북한, 쿠바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당제 정치체계의 기반을 확립했다.
7.1. 행정부[편집]
7.2. 정당[편집]
7.3. 외교[편집]
8. 경제[편집]
9. 과학[편집]
소련은 과학적 공산주의[81]를 표방하는 국가였던 만큼, 과학 기술을 중요시했고 초창기부터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기초과학과 우주과학, 군사 과학에서 많은 성과를 내놓았다.
연방 정부는 항공우주공학 분야에 막대한 재원과 인력을 투자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가장 큰 성과를 도출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스푸트니크), 개(라이카)[82]의 지구 궤도 비행,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유리 가가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세계 최초의 우주선 달착륙(루나 9호)[83], 세계 최초의 달 뒷면 사진 촬영, 세계 최초의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의 금성 우주선 착륙(베네라 7호), 세계 최초의 무인 로봇 달 탐사, 세계 최초의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 건설 등이 소련 우주 항공 과학계가 이뤄낸 업적들이다.
이밖에도 소련은 마스, 베네라 프로젝트 등의 다양한 계획들을 진행해 화성과 금성, 수성에 지속적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와 이를 수송하기 위한 세계 최대 규모 수송기의 개발도 추진했다. 1964년에는 최초의 통신 위성인 몰니야를 발사하고 67년 11월에 소련의 전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위성 통신망인 오르비타도 구축했다. 76년에는 미국의 GPS에 이어 위성 항법 체계인 ГЛОНА́СС(글로나스)의 개발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위성을 발사했다. 소련이 해체하는 그날까지 글로나스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소련 시기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 연방에서 글로나스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물리학, 수학, 군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했다. 특히 소련의 핵물리학, 화학, 천문학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서, 물리학 분야에서는 란다우 · 카피차 · 바소프 · 체렌코프 · 탐 · 프로호로프 · 프란크, 화학 분야에서는 세묘노프가 노벨상을 수상했다.[84]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물리학계의 므이소브스키 · 보골류보프 · 이바넨코 · 스코벨친 · 사하로프 · 베크슬레르 · 플레로프 · 쿠르차토프 · 폰테코르프, 방사선과 광학 분야의 만델쉬탐, 화학계의 젤린스키 · 쿠르나코프 · 레베데프 · 바흐 · 파보르스키, 생물학계의 프랴니시니코프 · 빌리야므스 · 푸스토보이트, 레이저 연구의 프로호로프, 우주 항공 과학 분야의 켈디쉬 · 코롤료프 · 글루쉬코 · 얀겔 등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소련의 과학 기술은 핵물리학과 군사 과학, 우주 항공 과학이 유명하지만, 전력 기술도 그 수준이 높았다. 국토가 광범위하고 인구가 거점 도시에 집중된 특성상, 발전소에서 전력 수요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송전 손실이 아주 높았던 소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송전 기술의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곳곳에 장거리 송전선을 깔았다. 그래서 소련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송전 기술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소련의 송전망은 세계 최대의 중앙 제어 체계로 동서 7,000km, 남북 3,000km에 걸쳐 있으며 중앙 전력 관리국이 관리했다. 연방 정부는 전력 제어 능력의 향상과 관리에 노력하고 컴퓨터를 도입해 활용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전력선 반송 통신, 무선 중계 장치, 디지털 전자 통신 기술을 보급하고 신기술을 도입했다.
소련은 철강 기술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60년대에 혁신적인 신기술들을 개발해 세계 철강업을 주도했으며 여러 철강 콤비나트에 대형 고로를 건설해 생산량을 늘렸다. 소련에서 개발한 조업 기술과 고압 송풍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콤비나트 시스템에 대한 투자도 계속되었다.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는데,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연방 정부는 항공우주공학 분야에 막대한 재원과 인력을 투자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가장 큰 성과를 도출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스푸트니크), 개(라이카)[82]의 지구 궤도 비행,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유리 가가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세계 최초의 우주선 달착륙(루나 9호)[83], 세계 최초의 달 뒷면 사진 촬영, 세계 최초의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의 금성 우주선 착륙(베네라 7호), 세계 최초의 무인 로봇 달 탐사, 세계 최초의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 건설 등이 소련 우주 항공 과학계가 이뤄낸 업적들이다.
이밖에도 소련은 마스, 베네라 프로젝트 등의 다양한 계획들을 진행해 화성과 금성, 수성에 지속적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와 이를 수송하기 위한 세계 최대 규모 수송기의 개발도 추진했다. 1964년에는 최초의 통신 위성인 몰니야를 발사하고 67년 11월에 소련의 전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위성 통신망인 오르비타도 구축했다. 76년에는 미국의 GPS에 이어 위성 항법 체계인 ГЛОНА́СС(글로나스)의 개발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위성을 발사했다. 소련이 해체하는 그날까지 글로나스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소련 시기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 연방에서 글로나스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물리학, 수학, 군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했다. 특히 소련의 핵물리학, 화학, 천문학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서, 물리학 분야에서는 란다우 · 카피차 · 바소프 · 체렌코프 · 탐 · 프로호로프 · 프란크, 화학 분야에서는 세묘노프가 노벨상을 수상했다.[84] 노벨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물리학계의 므이소브스키 · 보골류보프 · 이바넨코 · 스코벨친 · 사하로프 · 베크슬레르 · 플레로프 · 쿠르차토프 · 폰테코르프, 방사선과 광학 분야의 만델쉬탐, 화학계의 젤린스키 · 쿠르나코프 · 레베데프 · 바흐 · 파보르스키, 생물학계의 프랴니시니코프 · 빌리야므스 · 푸스토보이트, 레이저 연구의 프로호로프, 우주 항공 과학 분야의 켈디쉬 · 코롤료프 · 글루쉬코 · 얀겔 등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소련의 과학 기술은 핵물리학과 군사 과학, 우주 항공 과학이 유명하지만, 전력 기술도 그 수준이 높았다. 국토가 광범위하고 인구가 거점 도시에 집중된 특성상, 발전소에서 전력 수요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송전 손실이 아주 높았던 소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송전 기술의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곳곳에 장거리 송전선을 깔았다. 그래서 소련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송전 기술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소련의 송전망은 세계 최대의 중앙 제어 체계로 동서 7,000km, 남북 3,000km에 걸쳐 있으며 중앙 전력 관리국이 관리했다. 연방 정부는 전력 제어 능력의 향상과 관리에 노력하고 컴퓨터를 도입해 활용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전력선 반송 통신, 무선 중계 장치, 디지털 전자 통신 기술을 보급하고 신기술을 도입했다.
소련은 철강 기술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60년대에 혁신적인 신기술들을 개발해 세계 철강업을 주도했으며 여러 철강 콤비나트에 대형 고로를 건설해 생산량을 늘렸다. 소련에서 개발한 조업 기술과 고압 송풍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콤비나트 시스템에 대한 투자도 계속되었다.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는데,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9.1. 과학 행정[편집]
소련의 과학계는 연방 장관 회의의 산하 기관으로서 과학 기술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과학 기술 위원회, 연방 과학 아카데미, 교육성 산하의 고등 교육 기관, 산업 부처 산하의 연구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고 1987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러한 연구 기관의 숫자는 총 5천여개소였다.
소련의 과학 행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과학 기술 위원회이다. 위원회는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수립, 연구 개발 관련 규정과 기준의 제정,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집행에 관한 관리 · 감독, 과학 기술 정보의 수집과 제공, 대외 과학기술 협력의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예산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대학으로 대표되는 고등 교육 기관의 부설 연구 기관들은 전체 연구 개발비의 6%, 기초 연구의 15%를 차지했다. 이 기관들은 기초 연구를 위한 문제 해결 실험실, 정부 의뢰, 기업과 계약한 연구를 맡는 과학 연구 실험실로 나뉘며 대학 교수와 연구원,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진행했다.
과학 아카데미들은 자연 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도 포함되어 있으며 다양한 기초 연구와 산업과 관련된 장기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이 과학 아카데미들은 연방 과학 아카데미를 정점으로 하는 계서적인 체제이며 연방 과학 아카데미는 각 공화국 산하 과학 아카데미, 기타 과학 연구 기관, 대학 연구 기관들이 수행하는 자연 과학 연구에 대한 지도 업무도 맡았다.
각 산업 부처 산하의 연구 기관들은 다양한 디자인 관련 연구소, 실험실, 신기술 연구 기관 등으로 이뤄져 있고 상급 기관의 지시에 따라 관련 산업 분야의 응용 연구와 신기술, 새로운 공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소련의 설계국 제도는 주요 부처 산하의 중앙 설계국[85]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서 중앙 설계국 산하에 여러 종류의 설계국들이 중앙 설계국의 관리 · 감독을 받으며 설계 업무를 수행했다. 상급 기관에서 새로운 기계나 장비, 기체, 무기 등에 대한 제작을 요구하면, 중앙 설계국은 이에 대한 기초 연구를 진행하면서 어떤 기술을 활용하고 어떤 자원을 얼마나 사용할지, 어떤 기종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기초 연구가 끝나면, 중앙 설계국은 상급 기관에 그 결과를 보고하고 주요 부처는 승인 여부를 결정지었다. 승인이 떨어지면 중앙 설계국은 실험 설계국이나 특별 설계국 같은 산하 기관에 설계를 지시했다.
실험 설계국은 최종 설계, 신규 제품의 설계, 시험체 제작 업무와 상급 기관과의 협력 개발 연구까지도 하는 커다란 조직이다. 중앙 집권적인 소련답게 실험 설계국은 중앙 설계국의 통제를 받고, 그곳에서 세부적인 면까지 규정해 놓은 지침에 의거해 새로운 장비를 제작하는 게 실험 설계국 본연의 임무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율성도 있어서 지침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자신들이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기계를 설계했다. 기초 연구는 중앙 설계국에서 하기 때문에 실험 설계국의 장비 설계 과정은 단순하고 빠르게 추진되는 편이었다.
소련은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중앙 설계국에서 통상 2개 이상의 실험 설계국을 선정해 각 설계국에서 자신들만의 시제품을 생산하게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정하거나 대회를 개최해 다양한 시제품과 설계도들을 확보했으며 1개의 실험 설계국에서 부품은 동일하지만, 기본 설계가 다른 두 종류의 시제품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설계국도 내부적으로 다양한 설계팀으로 나뉘어져 경쟁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설계도를 제작했다.
소련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좋은 장비와 기계, 무기, 기체, 자동차들을 개발할 수 있었지만, 설계국 간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각자가 축적한 경험과 기술을 서로 활용하지를 못한다는 점과 과도한 경쟁 때문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AK-47의 개발이라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우주 로켓 개발 과정에서 코롤료프와 글루쉬코가 빚은 심각한 충돌일 것이다. 경쟁 설계국이나 설계팀, 기술자의 기술과 경험을 빼돌리는 일도 있어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기도 했다는 풍문도 있을 정도로 설계국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소련의 과학 행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과학 기술 위원회이다. 위원회는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수립, 연구 개발 관련 규정과 기준의 제정,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집행에 관한 관리 · 감독, 과학 기술 정보의 수집과 제공, 대외 과학기술 협력의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예산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대학으로 대표되는 고등 교육 기관의 부설 연구 기관들은 전체 연구 개발비의 6%, 기초 연구의 15%를 차지했다. 이 기관들은 기초 연구를 위한 문제 해결 실험실, 정부 의뢰, 기업과 계약한 연구를 맡는 과학 연구 실험실로 나뉘며 대학 교수와 연구원,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진행했다.
과학 아카데미들은 자연 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도 포함되어 있으며 다양한 기초 연구와 산업과 관련된 장기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이 과학 아카데미들은 연방 과학 아카데미를 정점으로 하는 계서적인 체제이며 연방 과학 아카데미는 각 공화국 산하 과학 아카데미, 기타 과학 연구 기관, 대학 연구 기관들이 수행하는 자연 과학 연구에 대한 지도 업무도 맡았다.
각 산업 부처 산하의 연구 기관들은 다양한 디자인 관련 연구소, 실험실, 신기술 연구 기관 등으로 이뤄져 있고 상급 기관의 지시에 따라 관련 산업 분야의 응용 연구와 신기술, 새로운 공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소련의 설계국 제도는 주요 부처 산하의 중앙 설계국[85]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서 중앙 설계국 산하에 여러 종류의 설계국들이 중앙 설계국의 관리 · 감독을 받으며 설계 업무를 수행했다. 상급 기관에서 새로운 기계나 장비, 기체, 무기 등에 대한 제작을 요구하면, 중앙 설계국은 이에 대한 기초 연구를 진행하면서 어떤 기술을 활용하고 어떤 자원을 얼마나 사용할지, 어떤 기종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기초 연구가 끝나면, 중앙 설계국은 상급 기관에 그 결과를 보고하고 주요 부처는 승인 여부를 결정지었다. 승인이 떨어지면 중앙 설계국은 실험 설계국이나 특별 설계국 같은 산하 기관에 설계를 지시했다.
실험 설계국은 최종 설계, 신규 제품의 설계, 시험체 제작 업무와 상급 기관과의 협력 개발 연구까지도 하는 커다란 조직이다. 중앙 집권적인 소련답게 실험 설계국은 중앙 설계국의 통제를 받고, 그곳에서 세부적인 면까지 규정해 놓은 지침에 의거해 새로운 장비를 제작하는 게 실험 설계국 본연의 임무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율성도 있어서 지침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자신들이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기계를 설계했다. 기초 연구는 중앙 설계국에서 하기 때문에 실험 설계국의 장비 설계 과정은 단순하고 빠르게 추진되는 편이었다.
소련은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중앙 설계국에서 통상 2개 이상의 실험 설계국을 선정해 각 설계국에서 자신들만의 시제품을 생산하게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정하거나 대회를 개최해 다양한 시제품과 설계도들을 확보했으며 1개의 실험 설계국에서 부품은 동일하지만, 기본 설계가 다른 두 종류의 시제품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설계국도 내부적으로 다양한 설계팀으로 나뉘어져 경쟁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설계도를 제작했다.
소련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좋은 장비와 기계, 무기, 기체, 자동차들을 개발할 수 있었지만, 설계국 간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각자가 축적한 경험과 기술을 서로 활용하지를 못한다는 점과 과도한 경쟁 때문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AK-47의 개발이라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우주 로켓 개발 과정에서 코롤료프와 글루쉬코가 빚은 심각한 충돌일 것이다. 경쟁 설계국이나 설계팀, 기술자의 기술과 경험을 빼돌리는 일도 있어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기도 했다는 풍문도 있을 정도로 설계국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9.2. 정권별 특성[편집]
혁명기에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혼란과 내전으로 인해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났고 이념적인 문제로 소련 정권이 세계적인 학자들을 추방하거나, 쏴 죽이기도 했다. 화학자인 티히빈스키가 이 시기에 총살당한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수많은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과학 인력을 수급하는 한편, 해외로부터 기술과 기계를 구매하고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서방 과학계가 이뤄낸 성과와 새로운 지식들을 확보했다. 또한 비밀 유지와 집중적인 연구 발전을 위해 과학 도시인 나우코그라드(наукогра́д)를 건설해 과학자들을 이주시키고 도시민들에게는 좋은 인프라와 대우를 제공했다.[86]
전시에는 랜드리스도 과학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5개년 계획 시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과학, 산업, 군사 분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 막대한 물자와 장비, 설비, 기계들을 제공하고 소련 과학자와 기술자, 관료들의 미국 견학도 허용해 주었다. 소련은 미국이 제공해 준 설비와 기계들을 뜯어 연구하고 미국이 제공해 준 과학 기술들을 활용해 자국의 과학 발전에 써먹었다. 클라우스 푹스 같은 스파이들이 제공해 준 기밀, 소련에 우호적이던 미국 과학자들이 해준 조언들도 소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재원을 투입하고 교육에 힘써도,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혁명기에 고향을 떠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좋은 대우와 높은 보수를 조건으로 귀국을 요청해 해외 과학의 성과와 유능한 과학 · 기술 인력들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소련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인재의 육성을 꾀했다. 예를 들어, 귀국한 카피차가 물리학 교육의 중요성과 독립적인 물리학 대학의 설립을 요청한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 모스크바 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으며 이 밖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연방 정부에 과학 교육과 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조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만, 이념과 스탈린의 편집증 문제로 인해 과학계는 인문학계가 당했던 것처럼 대숙청과 당의 간섭에 큰 수난을 치러야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재원을 쓸모 없는 곳에 써댄다고 의심하거나 서방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바빌로프 같은 세계 최고의 유전학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코롤료프 같은 천재가 굴라그로 끌려가 고생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굴라그에 있는 과학자 - 기술자 전용 수용소인 샤라쉬카에 갇혀 당의 지시에 따라 원치 않는 연구와 노동을 해야 했다.
굴라그에 끌려가진 않더라도 카피차처럼 고국에 귀향했다가 억류당해 수십 년 동안 출국을 못하고 소련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고[87] 베냐민 세묘노프 같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스탈린의 경제 정책을 반박한다는 이유로 연구 성과가 비공개 처리되거나 침묵을 요구받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람진처럼 공업당 사건 같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숙청당하기도 했다.[88]
게다가 정권에 기생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과학 이론을 내놓아 과학계에서 권력을 누린 트로핌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만들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위 문단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세례브로프스키, 코리초프 등의 생물학자, 유전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리센코와 그 도당은 스탈린이 죽고 정치 · 사회적 통제가 완화되자, 울분이 터진 과학계가 '300인의 편지'로 대표되는 집단 행동을 통해 실각시켰으나, 리센코는 흐루쇼프에 아부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기어코 과학계에 복귀해 권력을 잡았다. 돌아온 리센코는 흐루쇼프 정권 동안 소련의 농업과 유전학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런 정치계의 탄압과 사이비 과학자들의 난행 외에도 전쟁이 과학계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1차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나거나 죽었고, 혁명과 내전의 상처가 회복된 뒤에는 대조국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죽음이 발생했던 대조국 전쟁의 참화가 과학계를 덮친 것이다. 위 문단의 베냐민 세묘노프와 그 형 안드레이 세묘노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죽음을 맞았고,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학자들 또한 종자를 지키다 아사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의 학자와 기술자, 이공계 학생들이 아사하고 동사했으며 독일군에게 피살당하거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다만,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세묘노프 - 텐샨 가문이나 바빌로프 가문처럼 러시아가 자랑하는 과학자 가문 같은 경우에는 그 영향력과 업적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 스탈린도 적당히 제재를 가하는 수준에서 끝내거나 아예 처벌을 면해 주었다. 파블로프 같은 경우에도 당사자는 소련 정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소련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파블로프와 그가 이뤄낸 업적을 받들어 모셨다.
광물학자인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입헌민주당 당 중앙위 위원 출신에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핵심 반동'이고 그 아들인 역사학자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는 백군을 따라 크림 반도로 가서 브랑겔과 협력했다가 그와 함께 이스탄불로 떠난 자였다. 부자가 반동 중의 반동인데도 스탈린은 베르나드스키를 과학계의 원로로 대접했다. 스탈린이 베르나드스키에게 가한 제재는 그의 망명을 저지하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89]
그밖에도 러시아의 많은 과학자들이 숙청을 피하거나 적당히 견책, 좌천만 받는 수준으로 처벌을 끝내기도 했다. 소련에서 늘 차별받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유대인 같은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상당수가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전시의 소련 정부는 어떻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베어마흐트가 도시를 포격하고, 루프트바페가 폭격을 하는 와중에도 중요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나 기차에 실어 후방으로 이송했고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세묘노프 형제의 경우에도 정부의 후방 이송 요구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다 죽은 것이었다.
전후 소련의 과학계는 스탈린 정권이 양적인 확대를 이뤄낸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부족했다는 점과 과학계에 가한 간섭과 숙청,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을 중용한 것을 비판했다. 경제적으로도 스탈린 정권은 소련을 거대한 산업 국가로 변화시키긴 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개발한 기계와 기술을 활용하기 보다는 인력 동원에 치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카피차가 소련을 '머리는 조그마한데 몸집은 거대한 공룡'에 비유할 정도였다.
흐루쇼프 정권은 과학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 기관 간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 개선했으며 경제성 원칙에 입각하여 연구 과제와 사업을 선정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업과 연구 기관 간의 계약 연구 제도를 도입하고 연구소의 독립 채산제를 유도하여 총 연구 기관의 25%를 독립 채산제로 의무 운영하게 했다.
흐루쇼프 정권은 군사와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전략적인 기획을 수립하여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또한 기초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성장과 고급 과학 인력의 육성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소련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었고, 농업 발전을 위해 도시의 농업 연구소들을 농촌 지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군사, 핵물리학,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의 개혁은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았다. 계약 연구 제도와 연구소의 재정적 자립을 꾀하는 독립 채산제는 연구 기관들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소형 과제에 치중하게 만들어 기술 혁신을 주도할 대형 장기 연구 과제의 수행이 급감했다. 경제성을 중점에 둔 연구 과제 선정과 인센티브 제도는 미래에 연구가 만들어 낼 성과의 정량 분석이 어려워서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농촌 지역으로 이전된 농업 연구소들도 계획한 것에 비해 성과가 낮았고, 연구 성과를 이뤄내는 속도도 예상보다 느렸다.
흐루쇼프 정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어 소련 과학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통제가 완화되고 자유화가 진전된 흐루쇼프 시기였지만, 정보 확산에 통제는 계속되었다. 이 통제는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68년,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의 경제 개혁 원칙을 과학계에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흐루쇼프 정권이 받은 비판을 수용해 대형 장기 과제에 대한 연구를 각 연구 기관들에게 지시하고 미래 예측 기법을 도입해 연구 사업의 기획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HПO[90]를 세워 연구 - 개발 - 생산의 연계를 도모하려 했다.
1980년까지 250개가 설립된 HПO는 연구와 생산을 통합하고, 연구 기관과 설계국에서 기업이 보유한 생산 설비와 기술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를 내놓아서 기껏 개발한 설계와 기술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생산이 지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설계국과 생산 기업 간의 기술 격차를 해소할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각 산업 부처 별로 연구 지원금 제도를 실시해 부처들이 자율적으로 연구 기관에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게 하고 흐루쇼프 정권이 제정한 경제성에 주안점을 둔 인센티브 지급 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 덕분에 소련의 연구 기획 능력이 개선되었고, 연구 사업을 대형화시킨 것은 연구의 효율성을 제고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 과정에서는 연구 기관 간에, 기술 개발 단계 별로는 관련 부처, 연구 기관, 생산 기업 간의 협력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1983년, 과학 기술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연구 관계 부처들에 대한 조정권을 강화하고 HПO 제도도 개선했다. 대형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서방의 연구 사업단 개념을 도입하고 전용 연구 시설을 제공했으며 목적 지향적인 연구 기획 능력의 강화, 우선 순위에 따른 집중적인 예산 지원, 연구 성과와 품질에 따른 가격 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소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침체되었다. 소련은 1861 ~ 65년까지 연평균 4600개의 신기술 모형을 개발했지만, 1981 ~ 85년 동안에는 3500개로 줄어들었고 그 중에서 10% 정도만이 세계 수준을 상회했다.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과학계는 세계적인 수준에 있던 연구 & 개발 분야에서의 위상을 잃고 점차 쇠퇴해 갔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상기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신기술 개발의 속도와 양은 줄어들었고 그 수준도 세계 평균을 넘는 것이 많지 않았다. ГОСТ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산 공산품들 중에서 ISO 규격의 수준에 맞는 게 극히 드물어서 연방 정부에서 제품 규격 평가 기준을 완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던 철강 기술도 뒤쳐졌다. 80년대 소련의 발전소 열 효율은 일본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고 고로 1기당 연평균 선철 생산량도 일본의 40%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도 고로의 이용 계수와 코크스비는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우수한 고로의 보급이 잘 안 되고 노후화된 설비가 많아 설비 보수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정권은 기존 정권들의 개혁 노선을 따르면서 계획 관리 체제와 연구 과제의 예측 능력의 개선, 연구 기관 간의 경쟁 확대, 노후 설비의 교체와 최신 설비의 도입, 인재 육성, 중요 연구 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를 추진하는 한편, 연구 기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고 연구 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하고 고령의 연구원들은 과학 자문 기관으로 보내는 인사 정책의 쇄신도 추진했고 과학 생산 조합의 설립도 장려했다. 과학계와 산업계 간의 연계도 계속 강화되어서 대학의 연구 및 개발 사업은 80% 이상이 기업과의 계약에 따라 수행되었다.
소련은 인력, 투자면에서 방대한 연구 기반을 구축했으나, 과학 기술과 경제의 연계성 부족, 과학 기술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 부족, 중앙 통제에 따른 정보 확산의 인위적 통제, 낮은 컴퓨터 보급률 때문에 발생한 정보 유통 체제의 미비,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 부족 등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막대한 재원과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거대한 국가 연구 개발 체제가 가진 잠재력을 완전하게 이끌어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 후반부터 침체에 접어들었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공학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경제 침체와 투자 감소는 소련 과학의 쇠퇴를 야기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그 쇠퇴가 정점에 달해서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고, CIS 국가에 남은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래서 러시아 연방의 과학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91]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수많은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과학 인력을 수급하는 한편, 해외로부터 기술과 기계를 구매하고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서방 과학계가 이뤄낸 성과와 새로운 지식들을 확보했다. 또한 비밀 유지와 집중적인 연구 발전을 위해 과학 도시인 나우코그라드(наукогра́д)를 건설해 과학자들을 이주시키고 도시민들에게는 좋은 인프라와 대우를 제공했다.[86]
전시에는 랜드리스도 과학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5개년 계획 시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과학, 산업, 군사 분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 막대한 물자와 장비, 설비, 기계들을 제공하고 소련 과학자와 기술자, 관료들의 미국 견학도 허용해 주었다. 소련은 미국이 제공해 준 설비와 기계들을 뜯어 연구하고 미국이 제공해 준 과학 기술들을 활용해 자국의 과학 발전에 써먹었다. 클라우스 푹스 같은 스파이들이 제공해 준 기밀, 소련에 우호적이던 미국 과학자들이 해준 조언들도 소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재원을 투입하고 교육에 힘써도,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혁명기에 고향을 떠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좋은 대우와 높은 보수를 조건으로 귀국을 요청해 해외 과학의 성과와 유능한 과학 · 기술 인력들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소련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인재의 육성을 꾀했다. 예를 들어, 귀국한 카피차가 물리학 교육의 중요성과 독립적인 물리학 대학의 설립을 요청한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 모스크바 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으며 이 밖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연방 정부에 과학 교육과 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조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만, 이념과 스탈린의 편집증 문제로 인해 과학계는 인문학계가 당했던 것처럼 대숙청과 당의 간섭에 큰 수난을 치러야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재원을 쓸모 없는 곳에 써댄다고 의심하거나 서방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바빌로프 같은 세계 최고의 유전학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코롤료프 같은 천재가 굴라그로 끌려가 고생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굴라그에 있는 과학자 - 기술자 전용 수용소인 샤라쉬카에 갇혀 당의 지시에 따라 원치 않는 연구와 노동을 해야 했다.
굴라그에 끌려가진 않더라도 카피차처럼 고국에 귀향했다가 억류당해 수십 년 동안 출국을 못하고 소련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고[87] 베냐민 세묘노프 같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스탈린의 경제 정책을 반박한다는 이유로 연구 성과가 비공개 처리되거나 침묵을 요구받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람진처럼 공업당 사건 같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숙청당하기도 했다.[88]
게다가 정권에 기생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과학 이론을 내놓아 과학계에서 권력을 누린 트로핌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만들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위 문단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세례브로프스키, 코리초프 등의 생물학자, 유전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리센코와 그 도당은 스탈린이 죽고 정치 · 사회적 통제가 완화되자, 울분이 터진 과학계가 '300인의 편지'로 대표되는 집단 행동을 통해 실각시켰으나, 리센코는 흐루쇼프에 아부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기어코 과학계에 복귀해 권력을 잡았다. 돌아온 리센코는 흐루쇼프 정권 동안 소련의 농업과 유전학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런 정치계의 탄압과 사이비 과학자들의 난행 외에도 전쟁이 과학계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1차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나거나 죽었고, 혁명과 내전의 상처가 회복된 뒤에는 대조국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죽음이 발생했던 대조국 전쟁의 참화가 과학계를 덮친 것이다. 위 문단의 베냐민 세묘노프와 그 형 안드레이 세묘노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죽음을 맞았고,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학자들 또한 종자를 지키다 아사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의 학자와 기술자, 이공계 학생들이 아사하고 동사했으며 독일군에게 피살당하거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다만,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세묘노프 - 텐샨 가문이나 바빌로프 가문처럼 러시아가 자랑하는 과학자 가문 같은 경우에는 그 영향력과 업적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 스탈린도 적당히 제재를 가하는 수준에서 끝내거나 아예 처벌을 면해 주었다. 파블로프 같은 경우에도 당사자는 소련 정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소련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파블로프와 그가 이뤄낸 업적을 받들어 모셨다.
광물학자인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입헌민주당 당 중앙위 위원 출신에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핵심 반동'이고 그 아들인 역사학자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는 백군을 따라 크림 반도로 가서 브랑겔과 협력했다가 그와 함께 이스탄불로 떠난 자였다. 부자가 반동 중의 반동인데도 스탈린은 베르나드스키를 과학계의 원로로 대접했다. 스탈린이 베르나드스키에게 가한 제재는 그의 망명을 저지하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89]
그밖에도 러시아의 많은 과학자들이 숙청을 피하거나 적당히 견책, 좌천만 받는 수준으로 처벌을 끝내기도 했다. 소련에서 늘 차별받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유대인 같은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상당수가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전시의 소련 정부는 어떻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베어마흐트가 도시를 포격하고, 루프트바페가 폭격을 하는 와중에도 중요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나 기차에 실어 후방으로 이송했고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세묘노프 형제의 경우에도 정부의 후방 이송 요구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다 죽은 것이었다.
전후 소련의 과학계는 스탈린 정권이 양적인 확대를 이뤄낸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부족했다는 점과 과학계에 가한 간섭과 숙청,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을 중용한 것을 비판했다. 경제적으로도 스탈린 정권은 소련을 거대한 산업 국가로 변화시키긴 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개발한 기계와 기술을 활용하기 보다는 인력 동원에 치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카피차가 소련을 '머리는 조그마한데 몸집은 거대한 공룡'에 비유할 정도였다.
흐루쇼프 정권은 과학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 기관 간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 개선했으며 경제성 원칙에 입각하여 연구 과제와 사업을 선정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업과 연구 기관 간의 계약 연구 제도를 도입하고 연구소의 독립 채산제를 유도하여 총 연구 기관의 25%를 독립 채산제로 의무 운영하게 했다.
흐루쇼프 정권은 군사와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전략적인 기획을 수립하여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또한 기초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성장과 고급 과학 인력의 육성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소련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었고, 농업 발전을 위해 도시의 농업 연구소들을 농촌 지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군사, 핵물리학,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의 개혁은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았다. 계약 연구 제도와 연구소의 재정적 자립을 꾀하는 독립 채산제는 연구 기관들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소형 과제에 치중하게 만들어 기술 혁신을 주도할 대형 장기 연구 과제의 수행이 급감했다. 경제성을 중점에 둔 연구 과제 선정과 인센티브 제도는 미래에 연구가 만들어 낼 성과의 정량 분석이 어려워서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농촌 지역으로 이전된 농업 연구소들도 계획한 것에 비해 성과가 낮았고, 연구 성과를 이뤄내는 속도도 예상보다 느렸다.
흐루쇼프 정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어 소련 과학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통제가 완화되고 자유화가 진전된 흐루쇼프 시기였지만, 정보 확산에 통제는 계속되었다. 이 통제는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68년,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의 경제 개혁 원칙을 과학계에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흐루쇼프 정권이 받은 비판을 수용해 대형 장기 과제에 대한 연구를 각 연구 기관들에게 지시하고 미래 예측 기법을 도입해 연구 사업의 기획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HПO[90]를 세워 연구 - 개발 - 생산의 연계를 도모하려 했다.
1980년까지 250개가 설립된 HПO는 연구와 생산을 통합하고, 연구 기관과 설계국에서 기업이 보유한 생산 설비와 기술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를 내놓아서 기껏 개발한 설계와 기술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생산이 지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설계국과 생산 기업 간의 기술 격차를 해소할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각 산업 부처 별로 연구 지원금 제도를 실시해 부처들이 자율적으로 연구 기관에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게 하고 흐루쇼프 정권이 제정한 경제성에 주안점을 둔 인센티브 지급 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 덕분에 소련의 연구 기획 능력이 개선되었고, 연구 사업을 대형화시킨 것은 연구의 효율성을 제고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 과정에서는 연구 기관 간에, 기술 개발 단계 별로는 관련 부처, 연구 기관, 생산 기업 간의 협력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1983년, 과학 기술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연구 관계 부처들에 대한 조정권을 강화하고 HПO 제도도 개선했다. 대형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서방의 연구 사업단 개념을 도입하고 전용 연구 시설을 제공했으며 목적 지향적인 연구 기획 능력의 강화, 우선 순위에 따른 집중적인 예산 지원, 연구 성과와 품질에 따른 가격 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소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침체되었다. 소련은 1861 ~ 65년까지 연평균 4600개의 신기술 모형을 개발했지만, 1981 ~ 85년 동안에는 3500개로 줄어들었고 그 중에서 10% 정도만이 세계 수준을 상회했다.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과학계는 세계적인 수준에 있던 연구 & 개발 분야에서의 위상을 잃고 점차 쇠퇴해 갔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상기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신기술 개발의 속도와 양은 줄어들었고 그 수준도 세계 평균을 넘는 것이 많지 않았다. ГОСТ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산 공산품들 중에서 ISO 규격의 수준에 맞는 게 극히 드물어서 연방 정부에서 제품 규격 평가 기준을 완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던 철강 기술도 뒤쳐졌다. 80년대 소련의 발전소 열 효율은 일본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고 고로 1기당 연평균 선철 생산량도 일본의 40%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도 고로의 이용 계수와 코크스비는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우수한 고로의 보급이 잘 안 되고 노후화된 설비가 많아 설비 보수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정권은 기존 정권들의 개혁 노선을 따르면서 계획 관리 체제와 연구 과제의 예측 능력의 개선, 연구 기관 간의 경쟁 확대, 노후 설비의 교체와 최신 설비의 도입, 인재 육성, 중요 연구 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를 추진하는 한편, 연구 기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고 연구 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하고 고령의 연구원들은 과학 자문 기관으로 보내는 인사 정책의 쇄신도 추진했고 과학 생산 조합의 설립도 장려했다. 과학계와 산업계 간의 연계도 계속 강화되어서 대학의 연구 및 개발 사업은 80% 이상이 기업과의 계약에 따라 수행되었다.
소련은 인력, 투자면에서 방대한 연구 기반을 구축했으나, 과학 기술과 경제의 연계성 부족, 과학 기술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 부족, 중앙 통제에 따른 정보 확산의 인위적 통제, 낮은 컴퓨터 보급률 때문에 발생한 정보 유통 체제의 미비,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 부족 등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막대한 재원과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거대한 국가 연구 개발 체제가 가진 잠재력을 완전하게 이끌어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 후반부터 침체에 접어들었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공학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경제 침체와 투자 감소는 소련 과학의 쇠퇴를 야기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그 쇠퇴가 정점에 달해서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고, CIS 국가에 남은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래서 러시아 연방의 과학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91]
10. 사회[편집]
10.1. 복지[편집]
복지제도는 공산국가라는 특성답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탁아소는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매우 잘 되어 있었고[92], 아이를 기르는데에도 보조금을 충분히 지급해주어 적어도 아이를 기르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다.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있었다.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유급휴가 보장을 법에 명시한 나라였다. 이 당시에 연차일이 12일로 그리 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는 연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지라 정도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이후 연차일은 1967년부터 연장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24일의 유급휴일이 보장되었다. 이 때부터 보통 휴가철인 7월과 8월에 걸쳐 연차를 써 약 1달 정도 휴가를 보내는 편이었다.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 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93]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요양원도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속’에서 쉬라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연금은 남자는 만 60세 여자는 만 55세부터 받을 수 있었다. 연금액수는 임금의 절반 정도 받는 식이었고,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 남성 평균수명이 60대 중후반 정도였기에 긴 연금 수급 기간은 여성에게나 해당되고, 남성 평균 수급기간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있었다.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유급휴가 보장을 법에 명시한 나라였다. 이 당시에 연차일이 12일로 그리 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는 연차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지라 정도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이후 연차일은 1967년부터 연장되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24일의 유급휴일이 보장되었다. 이 때부터 보통 휴가철인 7월과 8월에 걸쳐 연차를 써 약 1달 정도 휴가를 보내는 편이었다.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 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93]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요양원도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속’에서 쉬라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연금은 남자는 만 60세 여자는 만 55세부터 받을 수 있었다. 연금액수는 임금의 절반 정도 받는 식이었고,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 남성 평균수명이 60대 중후반 정도였기에 긴 연금 수급 기간은 여성에게나 해당되고, 남성 평균 수급기간은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10.2. 주거[편집]
소련 주거문화는 아파트가 주류였다. 시골과 소도시의 경우에는 단독주택에서 살았지만 중대형 도시의 경우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94]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일명 코무날카라 불리는 공용주택이 지배적이라 한 가정에 방 하나를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95]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 당 한 주택이 기본이 되었다. 다만 흐루쇼프 정부부터 체르넨코 정부까지도 1980년 올림픽 때까지 1가구 1아파트를 목적으로 아파트 건설사업을 꾸준히 이어왔고, 흐루쇼프때 1가구 1방짜리 아파트에서 브레즈네프 정부 때는 1가구 3방짜리 아파트가 보편화되는 등 주거환경도 점차 나아졌지만, 핵가족화로 가구수 증가율이 인구증가율을 초과하면서 주택을 배급받기 위해 몇년씩 기다리는것은 여전해서, 1980년대 중반 기준으로 주택보급률은 85% 정도로 아파트를 받기 위해 공동아파트나 단칸방에서 살며 대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했다. 고르바초프 집권기 때는 주택보급기간을 최소한을 줄이기 위한 1가구 1아파트 주택건설계획을 세웠지만, 소련 해체로 주택을 무상으로 받는 제도가 사라지면서[96] 돈없는 빈민층의 주거환경은 도로 열악해지고, 신혼부부들도 무상아파트를 못 얻게되면서 상속에 기대는 경우가 태반이 되었다.
중소도시 지역은 건설 몇달, 늦어도 몇년안에 아파트를 바로 받을수있었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 등 인구 100만 이상 혹은 각 공화국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 지역은 토지 부족 및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개발제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짧게는 몇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대기하는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기기간 동안 공용아파트 단칸방[97]에서 세내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건설비용과 건축 용의성을 고려해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98]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아시가바트와 두샨베에서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99]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임대료와 관리비는 쌌기 때문에 주거비 부담은 매우 적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소련 가계소득에서 임대료와 관리비가 차지했던 비율은 3%였다. 이는 왠만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이 발달된 국가들보다도 소득대비 임대료가 훨씬 낮았으며 이는 저축률을 크게 늘리는데 용이했기 때문에, 소련 시민들의 높은 구매력을 뒷받침하였다.[100]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처럼 개인이 자유롭게 주택을 사고 팔 수 없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개인이 주택조합을 통해 주택을 구매[101]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급여수준에 비하여 비싼 편이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당시 단칸방 아파트의 가격이 대략 6,000루블에서 7,000루블 정도였다. 방이 3개 있는 아파트의 경우 약 10,000루블 정도에 달했다. 당시 노동자 평균 월급이 150에서 200루블 정도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일반적인 노동자가 오랫동안 일해도 쉽게 구하기 힘든 금액이었다.[102]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장시간 공용아파트나 단칸방, 또는 다락방이나 기존에 가족들과 살던 집[103]에 거주하면서 국가로부터 집이 나오길 기다렸다. 보통은 기숙사나 주택 또는 관사를 제공하는 직장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 자녀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선적으로 배급되었다.
또한 거주 이전도 자유롭지 않아[104] 이사가기는 쉽지 않아서 식구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재할당받을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소련인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사는 아파트를 가리켜 토끼집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105]
사실 소련이 국토가 넓었음에도 주택이 부족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사회기반시설 격차가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시에 우선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지방 인구가 일자리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농촌 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 편이었다.[106]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별장을 겸하여 시골에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 경우가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외에도 자동차 보급이 높지 않았던 것도 주택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을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107]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중소도시 지역은 건설 몇달, 늦어도 몇년안에 아파트를 바로 받을수있었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 등 인구 100만 이상 혹은 각 공화국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 지역은 토지 부족 및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개발제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짧게는 몇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대기하는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기기간 동안 공용아파트 단칸방[97]에서 세내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건설비용과 건축 용의성을 고려해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98]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아시가바트와 두샨베에서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99]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임대료와 관리비는 쌌기 때문에 주거비 부담은 매우 적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소련 가계소득에서 임대료와 관리비가 차지했던 비율은 3%였다. 이는 왠만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이 발달된 국가들보다도 소득대비 임대료가 훨씬 낮았으며 이는 저축률을 크게 늘리는데 용이했기 때문에, 소련 시민들의 높은 구매력을 뒷받침하였다.[100]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처럼 개인이 자유롭게 주택을 사고 팔 수 없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개인이 주택조합을 통해 주택을 구매[101]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급여수준에 비하여 비싼 편이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당시 단칸방 아파트의 가격이 대략 6,000루블에서 7,000루블 정도였다. 방이 3개 있는 아파트의 경우 약 10,000루블 정도에 달했다. 당시 노동자 평균 월급이 150에서 200루블 정도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일반적인 노동자가 오랫동안 일해도 쉽게 구하기 힘든 금액이었다.[102]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장시간 공용아파트나 단칸방, 또는 다락방이나 기존에 가족들과 살던 집[103]에 거주하면서 국가로부터 집이 나오길 기다렸다. 보통은 기숙사나 주택 또는 관사를 제공하는 직장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 자녀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선적으로 배급되었다.
또한 거주 이전도 자유롭지 않아[104] 이사가기는 쉽지 않아서 식구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재할당받을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소련인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사는 아파트를 가리켜 토끼집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105]
사실 소련이 국토가 넓었음에도 주택이 부족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사회기반시설 격차가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시에 우선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지방 인구가 일자리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농촌 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 편이었다.[106]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별장을 겸하여 시골에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 경우가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외에도 자동차 보급이 높지 않았던 것도 주택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을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107]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10.3. 노동[편집]
소련에서 전반적인 노동조건은 스탈린 시절 이후 좋아진 편이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주60시간 노동이 일상적이었다가 혁명 이후로 1일 8시간 주 48시간제로 바꾸었고 1927~33년에 이르는기간동안 주 42시간제로 . 물론 스탈린 시절에 대숙청 시기에 생산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근무태만으로 굴라크에 보내진다거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다시 근무시간이 증가하여 주 48시간제로 복귀되었고 전시 체제에서 지옥 같은 노동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 시대에 주5일제 주40시간 제도가 전면 시행되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부터는 직장 분위기가 크게 여유있게 변하면서 소위 복지 천국이라고 불리는 북유럽보다 근무조건이 개선되었다. 당시 소련 노동자는 휴가도 길게 배정받았고, 병으로 근무하지 못하는 때도 허가를 받아 국립 요양원에서 치료 목적으로 요양할 수 있었다.
특히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배정하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실업률이 0%대였고, 대부분의 기업이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은 하나는 높아서 한번 입사하면 어지간히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평생직장이 보장되었다.[108] 그러나 단기간 계약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상당수 있었고, 약 1,100만명 가량의 노동자가 매년 직업을 바꿨으며, 기술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거나, 실제 필요 인원에 비해 과다하게 배치되는 등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109] 따라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볼 때 실업률이 낮아보였지만, 실제로 모든 인민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생활한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무직자나 부랑자 등 일정한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일명 사회적 기생 혐의를 적용하여 처벌하였고, 스탈린 말기와 유리 안드로포프 시대에는 노동규율 강화를 명목으로 일정 수입이 없는 부랑민들도 단속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실업률이 얼마인지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기 어려웠다. 보통 4개월 이상 별다른 이유없이 일을 안하면 처벌하는 식이었고, 그래서 소련에서는 고프닉이나 부랑민도 최소한 부업을 가지거나 단기 혹은 단시간 계약직에 지원하여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정하고 몇년간 직장 안다니고 놀려면 최소한 자격증 시험이라도 본다는 핑계는 대던가, 병원 다녀와서 허위진단서라도 떼는 식의 수고는 들여야했던것이었다. 물론 가정주부들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농민과 사냥꾼들은 이 규정에서 당연히 예외이기는 했다. 사회적 기생죄는 특히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는데, 주로 반체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기여도가 낮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벌했다. 대표적으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는 소련 당국을 비난하는 문학작품을 내놓다가 사회적 기생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한동안 아르항겔스크에 있는 국영농장에서 노역해야 했다. 이 때문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나 반체제 문인처럼 소련 당국에서 탄압했던 사람들도 별도로 부업에 종사했다. 가령 빅토르 초이는 화부로 일했으며, 마이크 나우멘코는 극장 스태프였으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리 셰브추크는 미화원이나 화부, 야간경비원 등으로 여러 단기직업을 전전했다.
또한 브레즈네프 집권 후반기에는 노동생산성을 깎아먹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점이 되었다. 그래서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등극하고 나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잠시 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 사망 후 보수파 인사였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하면서 다시 느슨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에는 국민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음주를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배정하였기에, "공식적으로는" 실업률이 0%대였고, 대부분의 기업이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은 하나는 높아서 한번 입사하면 어지간히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은 평생직장이 보장되었다.[108] 그러나 단기간 계약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상당수 있었고, 약 1,100만명 가량의 노동자가 매년 직업을 바꿨으며, 기술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거나, 실제 필요 인원에 비해 과다하게 배치되는 등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109] 따라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볼 때 실업률이 낮아보였지만, 실제로 모든 인민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생활한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무직자나 부랑자 등 일정한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일명 사회적 기생 혐의를 적용하여 처벌하였고, 스탈린 말기와 유리 안드로포프 시대에는 노동규율 강화를 명목으로 일정 수입이 없는 부랑민들도 단속을 했기 때문에 실제 실업률이 얼마인지 정확한 통계를 집계하기 어려웠다. 보통 4개월 이상 별다른 이유없이 일을 안하면 처벌하는 식이었고, 그래서 소련에서는 고프닉이나 부랑민도 최소한 부업을 가지거나 단기 혹은 단시간 계약직에 지원하여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정하고 몇년간 직장 안다니고 놀려면 최소한 자격증 시험이라도 본다는 핑계는 대던가, 병원 다녀와서 허위진단서라도 떼는 식의 수고는 들여야했던것이었다. 물론 가정주부들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농민과 사냥꾼들은 이 규정에서 당연히 예외이기는 했다. 사회적 기생죄는 특히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쓰였는데, 주로 반체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기여도가 낮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벌했다. 대표적으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Иосиф Бродский)는 소련 당국을 비난하는 문학작품을 내놓다가 사회적 기생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한동안 아르항겔스크에 있는 국영농장에서 노역해야 했다. 이 때문에 언더그라운드 가수나 반체제 문인처럼 소련 당국에서 탄압했던 사람들도 별도로 부업에 종사했다. 가령 빅토르 초이는 화부로 일했으며, 마이크 나우멘코는 극장 스태프였으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리 셰브추크는 미화원이나 화부, 야간경비원 등으로 여러 단기직업을 전전했다.
또한 브레즈네프 집권 후반기에는 노동생산성을 깎아먹는 것이 사회적인 문제점이 되었다. 그래서 유리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등극하고 나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 잠시 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 사망 후 보수파 인사였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하면서 다시 느슨해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에는 국민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음주를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10.4. 의료[편집]
소련은 무상의료가 실질적인 형태로 구현된 인류 역사상 유일한 국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공공보건인민위원부장에 취임한 니콜라이 세마시코(Nikolai Semashko, 1874~1949)가 국가 주도 의료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소련은 공중보건에 관심을 기울여 결핵, 티푸스, 소아마비같은 질병을 예방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1978년에서는 알마아타에서 공중보건 증진을 촉구하는 알마아타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소련인들은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의료 체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휴식하면서 치료할 수 있는 요양원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급할 때 치료는 물론이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접근성도 높았지만, 높은 의료 접근성에 비해 질은 다소 떨어졌다.[110]
소련 붕괴 후 혼란기에 빠졌던 러시아가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기도 했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소련인들은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의료 체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휴식하면서 치료할 수 있는 요양원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급할 때 치료는 물론이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접근성도 높았지만, 높은 의료 접근성에 비해 질은 다소 떨어졌다.[110]
소련 붕괴 후 혼란기에 빠졌던 러시아가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기도 했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10.5. 치안[편집]
소련은 사회통제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보안기관이었던 합동국가정치부(OGPU)가 내무인민위원회(NKVD)로 합병된 1930년대 중반에는 경찰관이 곧 비밀경찰관 그자체였다. 특히 대숙청 시기 NKVD는 소위 NKVD 트로이카라 하여 지역당 서기, 검사, 지역내무서장 3명만 있으면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트로이카의 활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 사이 약 150만명 가량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66만명 가량이 총살되었다.출처 (러시아어)
이러한 공포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스탈린 시기 공포 통치를 견뎌내야 했던 공산당 간부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치안기관인 내무부(MVD)와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별도 부처로 분리시키고, KGB 또한 소련 정부 직속기관으로 변경되면서 이전보다 권한이 약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기와 같이 공권력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줄었을 뿐, 소련 사회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특히 소련은 반정부시위에 시위진압경찰을 투입했던 서방권과는 달리,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시위에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57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이 있으며, 1989년 트빌리시 시위 유혈진압과 이후 1991년 1월 리가, 빌뉴스에서 소련군과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 시도는 당시 텔레비전 등을 통해 소련 전국에 보도되면서 이후 소련 해체를 가속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다만 총기소지에 대한 규제는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관대했던 편이었는데, 이는 인구밀도가 낮아 야생동물에게 습격당하거나 범죄를 당했다고 신고해도 출동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 지역이 많았고, 이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도 사냥용 엽총 소지는 허용했다. 물론 사전에 사냥허가를 받아야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있기는 했다. 그래서 미국에 비해 살인범죄율이 낮은편이었지만, 치안은 아주 좋은것까지는 아니고, 보통수준으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소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범죄율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에 사냥용 엽총들이 암시장에 풀리기 시작한데다가, 동시에 밀무역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총기를 밀수하는 경우도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범죄율 증가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SFSR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1987년에는 10만명당 살인률이 6.3명이었던것이 1990년에는 14.2명으로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는 당시 안좋은 치안을 자랑하던 미국(10만명당 10명)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소련 붕괴 전인 1990년에서 1991년 즈음에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군대가 치안에 투입되어 거리에서 군인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전반적인 경제기반이 붕괴하면서 범죄율이 폭증했다. 비교적 경제사정이 안정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는 마피아나 스킨헤드, 부패 등 여러 범죄 소굴로 악명 높았다. 당장 불과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 유학하던 한국 유학생이 네오나치 폭력배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111][112]
이러한 공포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스탈린 시기 공포 통치를 견뎌내야 했던 공산당 간부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치안기관인 내무부(MVD)와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별도 부처로 분리시키고, KGB 또한 소련 정부 직속기관으로 변경되면서 이전보다 권한이 약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기와 같이 공권력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줄었을 뿐, 소련 사회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특히 소련은 반정부시위에 시위진압경찰을 투입했던 서방권과는 달리,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시위에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57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이 있으며, 1989년 트빌리시 시위 유혈진압과 이후 1991년 1월 리가, 빌뉴스에서 소련군과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 시도는 당시 텔레비전 등을 통해 소련 전국에 보도되면서 이후 소련 해체를 가속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다만 총기소지에 대한 규제는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관대했던 편이었는데, 이는 인구밀도가 낮아 야생동물에게 습격당하거나 범죄를 당했다고 신고해도 출동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 지역이 많았고, 이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도 사냥용 엽총 소지는 허용했다. 물론 사전에 사냥허가를 받아야된다는 전제조건이 달려있기는 했다. 그래서 미국에 비해 살인범죄율이 낮은편이었지만, 치안은 아주 좋은것까지는 아니고, 보통수준으로 평가되었다.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소련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범죄율이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에 사냥용 엽총들이 암시장에 풀리기 시작한데다가, 동시에 밀무역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총기를 밀수하는 경우도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범죄율 증가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SFSR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1987년에는 10만명당 살인률이 6.3명이었던것이 1990년에는 14.2명으로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는 당시 안좋은 치안을 자랑하던 미국(10만명당 10명)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소련 붕괴 전인 1990년에서 1991년 즈음에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군대가 치안에 투입되어 거리에서 군인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전반적인 경제기반이 붕괴하면서 범죄율이 폭증했다. 비교적 경제사정이 안정되는 200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는 마피아나 스킨헤드, 부패 등 여러 범죄 소굴로 악명 높았다. 당장 불과 2010년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에서 유학하던 한국 유학생이 네오나치 폭력배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111][112]
11. 문화[편집]
소련은 발레와 음악, 문학 등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통을 유지하고 장려했다. 소련 영화의 경우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유수의 영화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을 배출하면서 클래식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비롯한 발라드 가수에서 한국에서도 소련 락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키노까지 다양한 예술성을 선보인 음악인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은 문화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한 국가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국가가 판단하기에 거슬리는 표현은 중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이후 스탈린에 비판적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113] 하지만 문화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검열은 여전히 엄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한 록, 펑크 음악가들은 검열에 신경쓰거나 해적판 음반으로 겨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소련의 검열이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는 여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풍자, 비판하거나, 더나아가 아예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14]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115]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오페라나 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문화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으며 특히 영화산업은 정부지원이 끊긴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회복할 조짐을 보였으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소련식 관제문화로 회귀한다는 반발과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은 문화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한 국가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국가가 판단하기에 거슬리는 표현은 중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이후 스탈린에 비판적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113] 하지만 문화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검열은 여전히 엄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한 록, 펑크 음악가들은 검열에 신경쓰거나 해적판 음반으로 겨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소련의 검열이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는 여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풍자, 비판하거나, 더나아가 아예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14]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115]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오페라나 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문화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으며 특히 영화산업은 정부지원이 끊긴 이후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회복할 조짐을 보였으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소련식 관제문화로 회귀한다는 반발과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11.1. 관광[편집]
소련인들은 해외여행은 주로 불가리아, 쿠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루마니아를 비롯한 소련과 관계가 친밀한 공산국가나 인도같은 제3세계 국가들 위주로 갔다. 물론 당국에서 예술이나 학술적 목적으로 허락을 얻었거나, 선원이나 항공기 승무원같이 직업 특성상 해외를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원칙적으로 1세계 국가로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평범한 소련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여행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116] 우선 소련에서는 해외여권을 발급할 때 지역이나 직장 당조직에서 발급 심사를 거쳤다. 따라서 당국이 불순하게 여기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여권이 나오기 힘들었다. 출국 목적도 어학연수나 직무상 출장, 또는 학업같은 필수적인 이유여야 했으며, 여행 목적으로 신청할 경우 개인이 아닌 단체 관광으로 진행해야 했다. 설령 이러한 과정을 거쳐 허가가 나도 제1세계로 정치적 망명을 두려워하여 관광 가이드라는 명목 아래 KGB 요원과 동행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117] 그래서 당시 소련인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을 시행해서 1세계 국가로 제한없이 갈수있게된것은 1990년의 일이었다.
소련인들이 선호했던 국내 관광지로는 주로 기후가 온화한 크림 반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이나, 캅카스, 발트 3국 해안가, 바이칼 호수 등이 있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의 경우 중앙아시아를 이국적인 관광지로써 선호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여행권을 주로 패키지 단위로 팔았는데, 일반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좋은 리조트나 해변 호텔은 식비 포함해서 3주 머무는데 160~220루블이었고, 일반 호텔은 1달 숙박에 40루블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노동조합이나 지역당 내 공제를 통해 일정액을 직장에서 대신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노약자나 미혼모, 퇴역군인은 무료였다. 아무튼 여행비용은 21세기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는 평으로 이는 소련의 교통비가 저렴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다만 인기휴양지는 인원제한이 있었기때문에 대개 몇 년에 한번씩 숙박권을 받아 갔다고 하며,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지역이나 별장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소련은 냉전 시기 한국인들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적대국가로 지정되어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행금지국가였다. 이 시기 소련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론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특수직 종사자 같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이 소련을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90년 9월 이후였으나, 불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평범한 소련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여행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116] 우선 소련에서는 해외여권을 발급할 때 지역이나 직장 당조직에서 발급 심사를 거쳤다. 따라서 당국이 불순하게 여기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여권이 나오기 힘들었다. 출국 목적도 어학연수나 직무상 출장, 또는 학업같은 필수적인 이유여야 했으며, 여행 목적으로 신청할 경우 개인이 아닌 단체 관광으로 진행해야 했다. 설령 이러한 과정을 거쳐 허가가 나도 제1세계로 정치적 망명을 두려워하여 관광 가이드라는 명목 아래 KGB 요원과 동행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117] 그래서 당시 소련인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을 시행해서 1세계 국가로 제한없이 갈수있게된것은 1990년의 일이었다.
소련인들이 선호했던 국내 관광지로는 주로 기후가 온화한 크림 반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이나, 캅카스, 발트 3국 해안가, 바이칼 호수 등이 있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의 경우 중앙아시아를 이국적인 관광지로써 선호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여행권을 주로 패키지 단위로 팔았는데, 일반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좋은 리조트나 해변 호텔은 식비 포함해서 3주 머무는데 160~220루블이었고, 일반 호텔은 1달 숙박에 40루블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노동조합이나 지역당 내 공제를 통해 일정액을 직장에서 대신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노약자나 미혼모, 퇴역군인은 무료였다. 아무튼 여행비용은 21세기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는 평으로 이는 소련의 교통비가 저렴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다만 인기휴양지는 인원제한이 있었기때문에 대개 몇 년에 한번씩 숙박권을 받아 갔다고 하며,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지역이나 별장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소련은 냉전 시기 한국인들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적대국가로 지정되어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행금지국가였다. 이 시기 소련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론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특수직 종사자 같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이 소련을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90년 9월 이후였으나, 불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었다.
11.2. 교육[편집]
11.3. 스포츠[편집]
소련은 인민복지와 문화증진 차원에서의 체육을 많이 장려했고 스탈린 시절부터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 같은 체력장 시스템을 도입해 인민의 체력관리에 주목했다.[118] 생활스포츠 수준도 높은 편이었으며, 도시에도 수영장이나 체육관, 운동장 같은 기본시설을 중요시하여 반드시 지었다. 이런 소련의 영향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운동을 좋아한다. 학교에서도 중시하는데다 많은 대학교에서도 체육이 중요 과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체능을 경시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곤 한다.[119] 다만 운동 싫어하는 학생들은 체육수업 시간을 땡땡이 치기 일쑤였다고
소련 체육 인기 종목은 축구, 농구, 핸드볼, 아이스 하키 등이었다. 세미프로리그도 이들 종목 위주로 돌아갔다. 소련은 문화 복지 및 국위 선양 차원에서 운동만 전문적으로 경기하는 체육구단을 만들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민간기업이 스폰서로써 활동할 수 없는 대신, 군대나 보안기관, 철도청, 광업부같은 정부조직에서 구단을 후원했다. 이렇게 구축된 전문구단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오늘날 옛소련 국가 프로스포츠에서 활동하는 주요 베이스가 되었다.[120]
건국 초창기 소련은 올림픽을 자본주의 축제로 여겨 출전하지 않고 대신 스파르탁 대회(Spartakiade)라는 체육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과 긴장이 완화되면서 올림픽이 체제 선전 및 국위선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파견할 선수단을 신경써서 준비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특히 소련은 학교 교육에서 미리 재능있는 스포츠 영재를 적극적으로 선발하여 국가체육계에 투입하고 막대한 혜택을 부여했다. 소련은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에게 넓은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청바지같은 서구권 상품을 착용하도록 허락하고, 해외로 출국할 수 있는 권리[121]나 승용차도 상으로 부여했다.[122]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운동선수는 소련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세계 체육사에서 소련은 굉장히 선전한 편인데,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 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123] 다만 올림픽 선수들에게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약물을 투여하는 불법, 편법을 쓰는 경우가 횡행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KGB 차원에서 도핑 검사에 개입하여 약물검사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124] 이러한 관행은 훗날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2022년 카밀라 발리예바 도핑 적발 사건 등 대규모 도핑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125]
소련 체육 인기 종목은 축구, 농구, 핸드볼, 아이스 하키 등이었다. 세미프로리그도 이들 종목 위주로 돌아갔다. 소련은 문화 복지 및 국위 선양 차원에서 운동만 전문적으로 경기하는 체육구단을 만들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민간기업이 스폰서로써 활동할 수 없는 대신, 군대나 보안기관, 철도청, 광업부같은 정부조직에서 구단을 후원했다. 이렇게 구축된 전문구단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오늘날 옛소련 국가 프로스포츠에서 활동하는 주요 베이스가 되었다.[120]
건국 초창기 소련은 올림픽을 자본주의 축제로 여겨 출전하지 않고 대신 스파르탁 대회(Spartakiade)라는 체육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과 긴장이 완화되면서 올림픽이 체제 선전 및 국위선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파견할 선수단을 신경써서 준비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특히 소련은 학교 교육에서 미리 재능있는 스포츠 영재를 적극적으로 선발하여 국가체육계에 투입하고 막대한 혜택을 부여했다. 소련은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에게 넓은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청바지같은 서구권 상품을 착용하도록 허락하고, 해외로 출국할 수 있는 권리[121]나 승용차도 상으로 부여했다.[122]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운동선수는 소련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세계 체육사에서 소련은 굉장히 선전한 편인데,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 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123] 다만 올림픽 선수들에게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약물을 투여하는 불법, 편법을 쓰는 경우가 횡행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KGB 차원에서 도핑 검사에 개입하여 약물검사 결과를 조작하기도 했다.[124] 이러한 관행은 훗날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2022년 카밀라 발리예바 도핑 적발 사건 등 대규모 도핑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125]
11.4. 공휴일[편집]
12. 군사[편집]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РККА, 1918–1946)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С СССР, 1946–1991)이 있다.
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세계 1위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126],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세계 1위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126],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13. 대중매체에서[편집]
냉전 시절 제작된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제작된 매체에서는 냉전기가 배경이라도 소련을 좀 더 비중있거나 입체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주인공 또는 선역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탈린 시기 독재나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면모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예외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주인공 또는 선역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탈린 시기 독재나 전쟁 범죄 등 어두운 면모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일본 제국, 나치 독일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13.1. 영화[편집]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소련군 측을 주인공삼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철저히 서방의 시각에서 소련을 묘사했기 때문에 영화초반 돌격장면 등 소련군에 대한 왜곡과 고증오류가 담겨있어 실제 구 소련 출신 참전용사들이 해당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런 꼴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블랙 코미디 영화 아이언 스카이 속편 엔딩에서 뜬금없이 화성 표면에 있는 낫과 망치 모양의 기지를 보여주면서 떡밥을 뿌렸다.
13.2. 게임 & 애니메이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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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는 원래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스턴 프론트 모드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아예 배경이 독소전쟁이다. 그러나 2의 경우 소련군 캠페인에서 소련군을 나치 독일보다도 악으로 묘사해서 논란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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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람항로에 소련을 모티브로 한 세력인 노스 유니온(북방 연합)이 등장한다. 모티브답게 소속 인원들이 전부 하얀 털코트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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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탱크와 워 썬더 에서는 소련 국가가 등장하며 대전기 및 냉전기 장비들이 등장한다. 은근슬쩍 소련장비를 버프하고 미국 영국을 너프하는 등 소련 밀어주기를 하고 있다.[129] 물론 최근에는 타 진영에 강력한 골탱의 등장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소련의 위세는 많이 꺾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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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배경이 배경인만큼 1936년부터 1944년까지 빠지지 않고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국력이 국력이다보니 게임에서의 성능은 미국과 투탑급이다. 물처럼 쏫아나는 인력으로 독일을 상대로 인해전술을 선사하는데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다. 하지만 게임의 밸런스를 위해 공업력이나 테크는 시리즈 대대로 현실에 비해 부족하게 나오며, 사람이 잡으면 할 만 하지만 AI끼리 싸움을 붙여보면 독일에게 패망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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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걸즈 & 판처에 등장하는 학교 중 하나이자 전차도 4대 강호 중 하나이며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제 63회 전국 전차도 대회 준결승전 상대였던 프라우다 고교의 모티브가 되었다. 학교 이름 자체 부터 러시아의 일간지 프라우다에서 따온 명칭이고 학교의 엠블렘도 소련 국장의 패러디다. 별이 가위로, 낫과 망치가 제도용 자로 바뀐게 포인트다. 학원함도 키예프급 항공모함이고 보유/사용 전차들도 모두 소련제 전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전차도 부 대장 카츄샤도 강철의 대원수와 닮은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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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라이트 노벨/애니메이션인 마법과고교의 열등생에서는 신소련으로 부활한 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병합했고, 중국과 함께 일본 및 미국의 적성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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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AKIRA 에서 원작 만화 후반부에 네오도쿄에 해군 및 해병대 병력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 미국과 함께 세계를, 나아가 국제사회의 질서를 양분하는 UN상임이사국에 함께 속해 있는 국가로 나온다. 설정상 일본 간토 지구 신형폭탄 폭격 이후로 제3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및 북대서양 조약기구, 일본을 비롯한 기타 나토 지원국 및 동맹국들과 비핵전 세계대전을 벌이며 끝내 승부를 가르지 못하자 서로 휴전 선언을 하고 전쟁을 끝내 다시금 평화 공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후반부에 네오도쿄의 통제권을 잃은 일본 정부가 교토로 이전함에 따라 홋카이도를 재빠르게 점거하며, 일본 국방군과 소련 해군, 소련 공수군이 해상대치 중이라는 언급만 되며, 후반부 등장인물 중 초상능력학 연구 과학자인 두브로브스키 박사가 미 함대에 설치된 "주버나일 A"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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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시리즈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히틀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소련이 공산화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나치 독일의 포지션이 되고 미국, 유럽 등 자유 진영이 연합군이 되어 소련군의 공산주의 야욕에 대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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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게임 시리즈에선 당연히 레드 포 세력의 리더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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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선 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나치 제국에게 완벽한 패배를 당해 멸망했으며, 미국과 함께 매체 속 악역으로나 등장하는 등 현실에서 나치가 당하는 비난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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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서는 플레이어가 소련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주제이다. 다만 실제 러시아는 아니고 가공의 동유럽 국가이다. USSR은 따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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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믈린의 위기에선 소련의 서기장이 되어 소련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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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hammer 40,000에서는 소련에서 발사한 로켓을 본뜬 장난감이 4만 년이 지나서도 남아 감상평을 남기게 된다. C.C.C.P라는 뜻이 무엇인지는 여기선 잊혔고, 로켓의 구조가 너무 원시적이라는 식이다. #. 그래도 소련이 인류 최초로 홀리 테라 밖 우주로 보낸 유리 가가린은 '선한 목자 유리'라는 이름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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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믹 하트에서는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지 않아 나치 독일에 홀로 대항하기 위해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평행세계의 소련이 게임의 주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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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
21세기가 배경이라 당연히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 메인 적 세력인 국수주의파의 상징이 낫과 망치다. 또한 소련 붕괴의 결정타를 날린 어떤 유명한 폐허도 작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136]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시리즈 처음으로 적국으로 등장. 2차 대전 시리즈의 용맹함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필요 없어진 병사들을 토사구팽하려질 않나, 적국에 생화학 테러를 감행하려고까지 하는 비겁하고 추악한 나라로 묘사된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냉전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주적으로 등장. 붕괴가 얼마 남지 않은 80년대가 배경이라 골골대지만,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월드앳워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승리한다.[137]
13.3. 드라마[편집]
미국 드라마에서는 주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 내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미드에서 적성국으로 등장하는 나치 독일처럼 악의 제국까지는 아니지만, 소련 시절 공산주의 체제의 부정적인 모습을 자주 그릴 때가 많다. 단순히 (미국 출신) 주인공을 적대시하는 악당 세력에서 어떨 때는 미국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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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는 마인드 플레이어 다음가는 주적으로 등장한다. 미국보다 먼저 뒤집힌 세계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 넓은 국토 내에서 제대로 된 '관문'을 찾지 못했고 결국 외국으로 눈을 돌리다가 이미 문이 열린 적이 있었던 호킨스 마을에 비밀 기지를 세워서 다시 관문을 열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지를 FBI의 눈에 들키지 않고 운영한 것이나, 마지막화의 쿠키 영상을 보면 미국 연구기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모도그까지 길들이는 등 만만치 않은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암호 통신을 보내다가 더스틴 일행에게 감청당하고 암호가 뚫리는가 하면 비밀스러워야할 적성국의 아지트에서 버젓히 소련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등[138] 은근히 허당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즌 4에서도 등장할 확률이 크다.
13.4. 기타[편집]
비틀즈의 Back in the U.S.S.R.이란 곡도 있다. 링고 스타가 폴 매카트니의 훈계질에 빡쳐 밴드를 탈퇴해 폴 매카트니가 대신 드럼을 친 음악으로 유명한 곡이다. 물론 여기서는 소련 그런 거 없고 소련 여자가 예쁘다면서 찬양하는 것이 가사의 전부다(...). 오히려 같은 앨범에 수록된 Piggies가 비틀즈 멤버들의 정치적인 성향을 좀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코믹스 만화 왓치맨에서는 실제 역사대로 미국과의 냉전을 벌이고 있으나 미국이 닥터 맨하탄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손에 넣은[140] 이후부터는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미국의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며 동맹국들 사이에서 위신이 추락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끝이 없을 것 같은 평화와 번영 속에서 흥청대는 동안 와신상담하며 균형이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닥터 맨하탄이 미국 대중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 지구를 등지고 화성에 은둔하자 즉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141] 서독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초강수를 둔다. 미국이 닥터 맨하탄만 믿고 대비를 방만하게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펜타곤의 상호확증파괴 시뮬레이션은 NATO가 간신히 모스크바를 파괴할 동안 서유럽과 미국은 방사능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보여준다. 물론 소련도 서방과 함께 공멸하는 것은 원치 않았고 이에 어색한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뜻밖에도 뉴욕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파괴되는 대사건[스포일러]이 벌어져 소련이 미국에 구호물자와 구조 인력을 지원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빠르게 해동되어 냉전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 실제 역사와는 반대로 뉴욕의 파괴로 국력을 심하게 소진한 미국이 소련에게 저자세로 타협한 듯 하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러시아 선수들을 언급할 때 소련 선수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머지 멤버들한테 마구 까인 바 있다. 비교적 최근에 멸망한 나라이다 보니, 중장년층과 심지어 1980년대 후반 생들 중에서도 무의식중에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겪으신 노년의 어르신들은 오히려 러시아란 단어가 더 낯설기도 하고.[143]
14. 관련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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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30주년 특선다큐멘터리 붉은 제국 (1991.12.3~12, MBC)
[2]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Союз라는 단어는 연맹, 연합, 조합 결사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 가능하며 삼제동맹, 유럽연합도 Союз로 번역된다.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도 쓰인 표현이며 북한에서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이 공식 국명이다.[3]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25일에 하야하였고, 26일에 연방이 해체되었다.[A] 해체 직전.[5] 블라디미르 레닌은 국가 주도의 공용어라는 개념을 반대했고, 러시아어는 각 민족 간의 소통을 위한 언어였을 뿐이다. 정작 러시아 내에서도 1990년에서야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6] 구성 공화국별로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등 구성 공화국 고유 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었고, 구성 공화국 내 자치구역에서도 별개 공용어 지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러시아어가 공용어로서 실질적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이 언어들은 제2국어, 제3국어 역할에 그쳤다.[7] 다만 명목상의 수치일 뿐 실제로는 정교회를 믿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8] 소련 말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다당제가 승인되었다.[9] 당연하게도 소련은 15개 국가가 뭉친 연합이였기에 각 공화국별로 서기장이 있었다, 여담으로 구소련권 국가지도자들 중 각 공화국의 서기장을 지낸 인물들이 꽤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로 카자흐 SSR 공산당 1서기장 출신이었던 카자흐스탄 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있다.[10] 페레스트로이카 도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 집권 초기에도 신경제정책(NEP)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적 요소가 도입되었다.[11] 처음 통계가 집계된 1970년엔 $1,788 정도로 26위 정도 되었으나 침체를 겪으며 성장이 둔화되어 말기엔 겨우 65위였다.[12]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사용 중이다.[13] Soviet Union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IATA 코드가 그것. 소련 해체 직후의 러시아 연방도 이 코드를 잠시 사용한 적이 있다.[14] 이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이 국제 전화 코드를 사용하게 된다.[15] 1990년 한소수교 이전부터 일본을 거쳐 들어온 번역으로 1990년 한소수교 이래 소련이 이 국명의 사용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기이다.[16] 대한민국 표준어로는 소련도 연방, 러시아도 연방이라 부르지만 영어는 소련은 union, 러시아는 federation으로 그 차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Союз'는 영어명칭에서 Union인데, 'Union'는 연방이라는 뜻과 연맹, 조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나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소련이 자국의 러시아어 국호에 명확히 연방을 뜻하는 표현인 'Федератия'를 쓰지 않고 중의적 표현 'Союз'(연맹, 연합, 연방)를 사용하며, 하위 행정구역 문단과 소련/국호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소련이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합의 형태를 띄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부 매체나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는 자국을 이 국호로 표기한 적이 있었고, 북한에서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이 공식 국명이다.[17] 참고로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는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다. 짧은 기간이고 기존 정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지만 이는 소련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18]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히는데,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소련이다.[19] 1위와 2위는 당연히 중국과 인도였다. 참고로 중국은 2023년을 기점으로 인구 1위 타이틀을 인도에게 넘겨줬다.[20] 소속 당시에는 러시아 SFSR(또는 RSFSR)이라는 국명으로 존재하였다.[21] 오늘날 러시아 연방도 강대국이긴 하나 소련 시절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상당히 쇠퇴하였으며, 현재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는 소련 시절 국력을 바탕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전신인 러시아 제국도 소련만큼의 위상과 국력은 지니지 못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진정한 초강대국의 정의에 부합하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미국과 소련, 대영제국까지 셋 뿐이다. 당장 초강대국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윌리엄 폭스(William T. R. Fox)도 본인의 저서 'The Super-Powers: The United States, Britain, and the Soviet Union – Their Responsibility for Peace'에서 초강대국은 저 셋이라고 말한 바 있다.[22] [sɐˈjus sɐˈvʲet͡skʲɪx sət͡sɨəlʲɪˈsʲtʲit͡ɕɪskʲɪx rʲɪˈspublʲɪk]. 약자는 'СССР'인데 키릴 문자이기 때문에 '시시시피'가 아니라 '에스에스에스에르'라고 읽는다. (생활 속에서는 '에스에스에스에르'가 너무 길어 불편하기 때문에 '에스에스에르'로 줄여서 읽기도 한다.) 한편 러시아어를 라틴 문자로 쓴 'Sojúz Sovétskix Socialistíčeskix Respúblik'의 약자인 SSSR도 가끔 쓰인다.[23] 1970~1980년대의 스포츠 대항전에서 소련을 'URS'라고 표기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4] 줄여서 소비에트 연방이라 부르며 통상적으로는 소련(蘇聯)이라 부른다. 두음법칙에 의해 바뀐 소리는 준말이 되어 맨 앞글자만 중간이나 뒤로 들어가면 원래 소리가 되살아난다. 그래서 '연방'이라는 단어가 '련(聯)'으로 줄게 되는 것이다. '연합'도 마찬가지. 자민련, 한총련 등의 약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25] 북한에서는 국가의 정식 명칭을 표기할 때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모두 붙여 쓴다. 당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부터 한 단어로 붙여 쓰며, 다른 나라들도 '체스꼬공화국', '로씨야련방', '도이췰란드련방공화국' 등으로 모두 붙여 쓴다.[26] 가사에서 스탈린 찬양 가사가 삭제되었다.[27] 폴란드 침공부터.[28] 소련은 20세기 초엽 혁명 직전의 러시아 제국보다도 작았다. 즉, 제정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핀란드와 폴란드 동부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로 넘어가 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29] 그 11%밖에 안 된다는 경작지 넓이도 환산해 보면 콩고민주공화국과 알제리 넓이에 필적한다.[30] 정확하게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쪽이 소련과 접한다.[31]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이 사할린 섬의 남부, 소련이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괴뢰국인 만주국이 사실상 일본 제국의 영토에 가까웠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길게 접하고 있던 셈이다. 실제로 만주국 국경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충돌이 자주 있었으며, 그 충돌이 크게 번진 것이 할힌골 전투이다.[32] 소련의 원유 생산량은 1974년 미국을 추월하고 세계 1위가 되었다.[33] 오늘날 러시아만 해도 새로 이민 온 인구를 제외하고도 180~200여 가지 민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34] 독일인들은 소련 초기에 볼가강 유역에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탈린 시기에 인구의 대다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면서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명목상의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고 추워서 정작 유대인들은 얼마 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자치주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는 하다.[35] 그래서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당 간부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층인 경우가 많았다.[36] 비슷한 사례로 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급차 1대가 아파트 1채 값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서민차로 출시한 대우 티코도 첫 출시 당시인 1991년에 약 300만원~400만원대였는데 당대 저임금 노동자들의 1년 봉급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니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37] 자가용 1대를 구할려면 10년씩이나 걸린다는 농담도 실제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38] 오토바이 가격은 1987년 기준으로 신제품은 직장인 몇달치 급여 수준이면 살수있었다.[39] 아니면 복권 경품으로도 자동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보다는 자동차를 받았다.[40]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 통행요금이 완전 무료였던지라 당국 입장에서 도로 건설로 수익을 창출한다는 개념이 낯설었던 이유도 있기는 했다.[41] 당시 유일하게 인구 100만명에 육박했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지하철이 건설될 계획이었으나, 지반 문제와 현지인들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42] 굵은 선 안쪽이 소련 당시의 영역이며, 분홍색 지역은 러시아로, 나머지 지역은 현재 독립한 국가들로 귀속되었다. 다만 저 지도에서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동부 일대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명목상으로 합병된 상태고, 또 조지아 영토 내부에 위치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도 사실상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친러성향의 미승인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영토가 저대로 귀속됐다고 볼 순 없다.[43] 소련 국명을 직역해보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44] 이와 비슷하게 동유럽 국가들 중 최상위 행정구역을 '공화국'으로 지칭한 나라로는 체코슬로바키아[45], 유고슬라비아[46]가 있었다. 사실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지역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들이 연합하여 성립된 국가였다. 특히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은 미국과는 달리 이전부터 그 나름의 체제와 정부,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연방이라는 형태로 묶어서 더 큰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부터 그냥 갈라서면 남남인 상황이었다. 소련도 해체 뒤에 각 국가들이 남남이 되었는데, 하필 민족주의의 대두 때문에 소련 시절에는 문제가 없던 공화국 별 민족 문제가 심각하게 커져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문제가 번지게 되었다.[45]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의 연합.[46]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의 연합.[47] 출생 자체는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했지만, 주요 정치경력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시작하였다. 쿠르스크 주는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과 바로 붙어있어 우크라이나와 가까웠다.[48] 고려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이외에도 체첸인이나 크림 타타르, 불가 독일인, 칼미크인들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49] 물론 이것도 인구가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러시아 출산율이 1.9-2.0명 대 수준으로 떨어져서(물론 소련 전체의 출산율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일대 공화국의 출산율이 높은 덕택에 2명대 중반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개발도 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이주를 권유하는 정책을 중단했다. 그렇지만 타 공화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온 건 아니라서 여전히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인 비율은 상당한 편이고, 소련 붕괴 이후에 상당수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복귀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러시아인들이 많은 편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민족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50] 1918년 이전, 소련 정부와 수도 공유[51] 1934년 이전[52] 소련이 존재했던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벨라루스'가 아니라 '백러시아'로 불렀다. 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를 거쳐 벨라루스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백러시아라는 표현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벨라루스를 러시아어로 표기하면 Белоруссия인데 앞에 붙는 Бело는 Белая에서 따온 것으로 '하얀', 즉 '백'의 뜻이다. 뒤에 붙는 руссия는 Россия에서 따온 것으로 러시아를 뜻한다. 즉 이 두 단어를 합쳐 벨라루스(키릴자로는 벨라루씨야)라 하는데 뜻이 서술되었듯 백러시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말에 있어서는 오히려 백러시아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독일어와 중국어로는 여전히 'Weißrussland', '白俄罗斯' 즉 '백러시아'라고 쓴다.[53] 1919년 건립 직후 닷새동안 스몰렌스크에 수도를 두었으나 이후 수도를 민스크로 이전했다.[참고1] 54.1 54.2 54.3 54.4 54.5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55] 1930년 이전[참고2] 57.1 57.2 57.3 미국 등 몇몇 유럽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62] 1919년부터 1927년까지 폴토라츠크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가 후에 변경되었다.[64] 레닌의 주장으로 소련 구성국에는 연방을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지만 스탈린 시절 탈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소련 중앙정부가 허용하지 않으면 구성국의 독립이 불가능해서 발트 3국의 독립 요구를 고르바초프는 불법이라며 거부했지만 고르바초프가 8월 쿠데타로 실권을 상실한 후 승인되었다.[참고] 미국 등 몇몇 서방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66] 겨울전쟁으로 얻은 카렐리야 동부에 세워졌다. 1956년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자치 공화국으로 흡수되면서 소멸되었다. 현 카렐리아 공화국.[67]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분리 선언. 몰도바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았다.[68]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분리 선언. 러시아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았다.[69] 소련 해체 당시(1991년) 기준이다.[70] 1990년 10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71]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72] 1990년 11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73] 1956년 7월 성립. 상술한 카렐리야-핀란드 SSR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탄생했다.[74]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75] 1924년 해체[76] 1925년 해체.[77] 1941년 해체[78] 러시아 SFSR에서는 1945년 6월 30일 해체. 이후 1954년에 크림 반도 지역이 우크라이나 SSR로 이양되었고 우크라이나 SSR에서 소련 해체 몇달전인 1991년 6월 19일 부활. 다만, 다른 구성국으로 넘어간 후 부활한 것이기에 괄호 후 취소선 처리했다.[79] 나히체반 주민들은 본국인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들과 동족인데도 자치공화국이 된 점에서 특이한 사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인 듯. 정작 이민족인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한 등급 낮은 자치주였다.[80] 물론 스탈린 시절에 강제이주 당한 소수민족 가운데 상당수는 스탈린이 격하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기는 했다만 전부 되돌아온 것이 아닌데다가, 되돌아온다 해도 타 민족(주로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81] 애초에 공산주의의 원래 이름이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유물론 철학을 중시한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까지 제작할 정도로 과학을 중요시했다.[82]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은 아니다. 그 전에도 초파리를 인공 위성에 띄워 보냈었기 때문. 정확하게는 그때까지만 해도 라이카가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우주 경계선을 정의하면서 바뀌었다.[83] 이보다 앞선 루나 2호는 착륙이라기보다는 충돌시킨 것이다.[84] 사하로프도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하로프는 '평화상' 수상자이지, 전공인 물리학 분야에서 거둔 성과로 상을 받지는 못했다.[85] (ЦKB. 체카베. 영문 : TSKB[86] 나우코그라드를 죄다 비밀 도시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이는 소련의 비밀 도시와 과학 도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과학 도시들은 일부만이 비밀 도시였고 상당수 과학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곳들이었다.[87] 스탈린은 카피차가 원하는 것이라면 거의 다 들어주었지만, 출국만큼은 끝까지 막았다.[88]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대중들이 주목하거나 불만이 터지면, 중간 관리직이나 기술자, 과학자, 학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으며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들을 희생시켰다.[89] 다만,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혁명 초기에 과거 이력 때문에 숙청당할 뻔했는데, 그를 사면해 달라는 탄원이 너무 많아서 혁명 정부에서 풀어주었다.[90] Научно-производственное объединение. 과학 생산 협회. 영문 : SPA. SCIENCE PRODUCTION ASSOCIATION[91] 소련 최고의 수학자가 연방 해체 후에 생계가 어려워져서 화장실을 숙소로 쓰면서 살다 변기에 앉은 채로 아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보다 여건이 나은 과학자들도 제대로 된 연구와 학술 활동을 하기는커녕,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92] 임산부-어린이 전용좌석이 형식적이었지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졌던 국가였다[93] 장기 근로자의 경우에는 여름 별장도 주어졌다.[94] 물론 소련 도시민이라고 해서 단독주택 생활을 아예 안한것은 아니고, 따로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지만 휴가철에 별장 용도로 소유한 것이다.[95] 혁명 직후 귀족들이 버리고 간 대주택 안에 여러 가구가 방을 배정받은 경우도 흔했다.[96] 다만 러시아 공무원들은 주택을 여전히 무상으로 받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기 소유로 만드는것도 가능하다. 러시아의 공무원 급여수준이 일반 사기업보다 낮아 부정부패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평을 듣는데,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공무원들의 실질 급여를 높이기 위해 무상아파트 배급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것이다.[97] 보통 외국의 스튜디오 아파트나 더 쉽게 설명해서 한국의 원룸을 떠올리면 된다.[98] 이 당시 도시인구가 많은 유럽권 공화국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은데 반해 농촌인구가 많은 중앙아시아권이나 캅카스, 몰도바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출산율의 불균형은 1960년대부터 소련 당국에서 골칫덩어리로 여겨졌다. 다만 유럽권 공화국이라 해도 주택사정이 널널한 농촌은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3명대를 기록했기 때문에 1명대 중후반대인 도시지역에 비해 크게 높아 이 당시에 인구증가는 그럭저럭 이루어져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로 농촌의 출산율도 급감하면서 인구감소 문제가 초래된것. 이 당시에 유럽권 공화국 도시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련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여러번 실시했다. 사실 이를 반영해서 소련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의 넓이는 넓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의 크기가 커졌다해도 주민들의 구미에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99] 당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은 아르메니아로 되돌아가던 상황이었다.[100] 물론 소련 당국과 기업에서 이러한 높은 저축자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것이 함정이기는 했다.[101] 정확히는 해당 주택에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거주권을 구매하는 형태였다. 오늘날 중국과 비슷하게, 소련에서 모든 토지 및 부동산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다.[102] (출처) Could ordinary Soviet people buy themselves an apartment? (영어)[103]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보통 자녀가 성인이 될 경우 독립하여 분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소련에서는 주택문제로 인하여 집을 구하기 여의치 않을 경우 미혼인 성인자녀가 부모와 계속 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104] 중국의 후커우 제도와 비슷하게, 소련에서는 거주지 등록제도를 이용해 도시 거주인구의 거주허가를 제한하여 사람들이 도시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방지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거주지 제한이 풀리자 사람들이 일자리나 학업으로 주요 도시로 몰리면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한국의 서울 공화국과 유사하게 수도 집중이 심한 편이다.[105] 다만 소련 붕괴 이후 부동산이 민영화되고 임대료와 부동산이 급속히 오르면서 집값과 임대료 감당이 힘든 서민들은 이런 이유로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106] 좀 더 쉬운 예로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인구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이주한 역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실 소련 뿐만 아니라 한국같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진행한 국가들의 경우, 공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시의 식량 공급 및 물가를 이유로 농작물 가격을 저렴하게 유지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농촌 사회의 희생이 따랐다.[107] 대다수 구소련권 국가에서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보편화된 것은 21세기이고, 그나마도 경제 사정 상 중고차를 수입해 타는 경우가 많다.[108] 물론 그 대신에 급여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은편이었다. 다만 공공요금이 쌌고, 집을 싸게 임대했으며, 시장에서 부업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걸로 버텼다.[109] (출처) Soviet Union: Are the Jobless Unemployed? (영어) (소비에트 연방: 무직자는 실업자인가?), 1965년 8월 20일, TIME.[110] 특히 지역 간 격차가 큰 문제로 꼽혔다. 물론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국토가 넓은 나라라면 다들 겪는 문제라 특이한 것이 아니지만, 소련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가령 영아사망률도 도시화율이 높은 발트 3국은 선진국 수준의 양호한 수치를 보였지만, 농촌에 주거하는 비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 국가들은 영아사망률이 개도국 수준으로 높게 나오는 식이었다. 또한 치과 치료도 품질이 썩 좋지 못했다.[111] (출처1) 한국유학생, 러시아서 집단폭행 당해 사망 '충격', 2010년 2월 9일, 한국경제신문.[112] (출처2) 러시아 한인 유학생 괴한에 피습 중태, 2010년 3월 8일, KBS.[113] 오늘날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당시 소련에서 출판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114] 대표적인 사례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영화 백야로 유명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이 있다.[115] 한국만 해도 케이블 TV가 보급되기 이전 다큐멘터리 등등의 시청률이 높았다가 케이블 TV 보급 이후 채널 선택권이 폭증하면서 결과적으로 교양 관련 프로그램 시청률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하락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었다.[116] 쉬운 예를 들자면 1989년 여행자유화 이전 일반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가 당시 소련인들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와 비슷했다.[117] 그럼에도 냉전 시기 예술가나 운동선수를 비롯해 해외여행이 가능했던 고급 인력들 중에서는 해외로 출국한 때를 이용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118] 물론 국민의 체력은 전시에는 전투력과 연관된다는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119] 당연히 시험으로 체조나 턱걸이 같은 걸 해야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이면 빼주는데, 체육시험은 대부분의 한국학생이 통과하기 힘들다. 그래도 수업 자체는 수강해야 하는 편.[120] 대표적으로 축구에서는 오늘날 독립국가연합에서 최상위권 팀으로 분류되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디나모 키이우 등이 있다.[121]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소련에서는 일반인이 동구권을 제외한 해외에 출장 및 여행을 가기 매우 어려웠다.[122] (출처) Sports Psychologists and the Soviet Athlete, Herb Weinberg, March 12, 1978, New York Times[123] 참고. 네이버 하계올림픽 우승국 참고[124] (출처) The 1980 Olympics Are The 'Cleanest' In History. Athletes Recall How Moscow Cheated The System, Aleksei Aleksandrov, July 22, 2020.[125] 사실 2000년대 전까지 소련 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동독 등 당시 체육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다만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체육계 내부인사들이 올림픽에서 도핑이 이루어진 사실을 폭로하면서 미국반도핑기구(USADA)가 국제표준에 맞추어 독립기구로 발족하면서 도핑심사를 강화해 갔다면, 러시아에서는 소련 시절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아 연방보안국 차원에서 국가적인 도핑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심지어 러시아반도핑기구 차원에서 도핑 프로그램을 은폐하다가 결국 내부자 고발에 의해 실상이 폭로되었다.[126] 다만 그 명성에 비하면 보급 역량은 굉장히 형편없었다.[127] 소련총도 많이나온다 예시로 AK-47[128] 2차 대전기 배경임에도 특이하게 적으로 등장한다.[129] 월드 오브 탱크를 만든 워게이밍넷, 워썬더를 만든 가이진 둘 다 옛 소련 지역에 있는 회사이다. 특히 가이진은 돈바스 전쟁에서 노보로시야를 후원했다는 의혹이 있다.[130] 제4제국은 하켄크로이츠를 변형한 깃발을 쓰며, 한자 동맹은 링라인이라는 정식 명칭에 걸맞게 갈색 원을, 주인공 세력인 레인저는 메트로의 M에서 따온 문양을 상징으로 쓴다.[131]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의 D6 전투에서 크게 패해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4제국과 기타 공동체보단 크고, 레인저를 거의 반 몰락 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가장 위험한 적수였던 한자 동맹은 잔존 러시아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붉은 라인에 관심이 멀어졌기 때문이다.[132] 따로 생각해 보면 다른 냉전 매체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매우 굴욕적인 모습이다. 더럽게 큰 땅덩어리와 여러 공산주의 국가를 주도했던 국가인데 해당 시리즈에서는 중국한테 밀려서 2인자 공산주의 국가로 물러났고 다른 나라가 전쟁으로 난장판이 되던 시기에도 언급조차 없다.[133]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련이었다.[134] t-34는 이미 1940년부터 생산했었다.[135] 당연하겠지만 게임적 허용이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려면 외계 세력들 명칭에 영어식 명칭을 쓰는 것도 문제삼아야 한다,하프라이프 시리즈의 콤바인이라던가, 헤일로 시리즈의 코버넌트도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는 소리이다.[136] 참고로 프리피야트 캠페인에서 PPSh-41을 든 소련군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137] 단, 정사는 아니다.[138] 이걸 보고 스티브 해링턴은 레드 던 드립을 쳤다.[139] 이 때문에 현실의 역사보다 성평등이 더욱 가속화했다. NASA의 수장이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의 제자인 여성이고,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도 등장한다. 어찌보면 체제경쟁의 의도치 않은 순기능이었던 셈.[140] 사실 닥터 맨하탄은 언제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미국을 떠나 소련에 붙는다 하여도 그것에 대해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고 아예 소련이고 미국이고 집어치우고 지구를 통째로 불태우고 얼리고 짜부려뜨려도 인간들은 저항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손에 넣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일단 미국 대중이 믿는대로 표현하자면 그랬다.[141] 실제 역사처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지원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일방적인 구타 양상으로 순식간에 점령당한다.[스포일러] 상호확증파괴 핵전쟁을 막고자 했던 오지만디아스의 음모였다.[143] 그렇게 된 이유중 하나가 과거 소련이 존재했던 시절에도 서방권에서 소련을 지칭할 때 러시아라고 대신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은연중에 러시아=소련 이렇게 된 것도 있다. 영화 록키 4를 보면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에, 소련 선수와 경기를 하는 모습인데도 '러시아'라고 지칭하는 예가 많다. 특별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집어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소련을 지칭할 때 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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