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해규모
147명 사망, 437명 부상
결과
보리스 옐친의 승리
영향
인민 대표 회의와 최고회의 해체
상원 연방의회 및 하원 국가두마 설립
새 헌법 채택
보리스 옐친의 독재 권력 강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완전한 소멸
러시아 헌정위기는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과 러시아 최고회의 사이에서 헌법 제정 및 국정 운영을 두고 벌어진 정치적 분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통령과 의회가 서로를 해산하고 탄핵하자 대통령이 군대를 이끌고 국회의사당을 공격한 친위 쿠데타라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독재 국가 러시아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유의 사태였다.
러시아에서는 워낙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 때문에 보통 중립적으로 10월 사태(Октябрьские события)라고 부르는 편이다. 그 외에 "최고회의 해산(Разгон Верховного Совета)", "백악관 공격(Штурм Белого дома)", 백악관 포격(Расстрел Белого дома)" 등의 표현도 쓰인다.
이 사건으로 옐친은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이 10월 혁명과 같은 무력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완벽하게 제압해 버렸다. 특히 옐친은 10월 5일 최고회의를 지지한 언론들을 폐간시키고 러시아 공산당 및 좌익 계열 단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또 10월 6일 러시아 헌법재판소장이었던 발레리 조르킨을 해임시키고 최고회의를 지지했던 지방 회의(지방 소비에트)들을 해산시켰다. 또한 언어학자였던 드미트리 리하초프, 가수였던 불라트 오쿠자바 등 개혁파 인사들은 10월 5일 옐친에게 공산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 해체, 무장세력 해체, 파시즘 및 국수주의, 인종주의 프로파간다 금지 등을 담은 공개 서한을 보내 최고회의 세력을 철저하게 처벌할 것을 호소했다.
한편 옐친에 의해 해산된 최고회의는 1993년 12월 입법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 즉 오늘날의 러시아 상원인 연방회의(Совет Федерации)와 하원인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로 재편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1993년 12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채택해 기존의 소련식 정치체제에서 벗어나 이원집정부제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인 '러시아의 선택'은 극우파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에게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월등히 밀렸고 의석수도 동률을 기록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특히 비례대표에서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도 고작 3%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비슷하게 친옐친파 정당인 러시아 협정당을 합쳐도 86석에 불과했기 때문에 친옐친파 정당의 의석 수는 개헌저지선에도 한참 미달했다. 또 정치 혐오가 극심하여 투표율도 1990년 러시아 최고의회 선거와 1991년 대통령 선거에 비하면 크게 떨어진 54%에 그쳤으며 의석의 상당수를 무소속 의원들이 차지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일단 발등의 불을 껐지만 의회에서는 압도적으로 여소야대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도리어 옐친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 것도 동시에 확인했기 때문에 옐친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 세력은 이 사건을 절대 잊지 않았다. 1993년 총선에 이어 1995년 총선에서도 반(反) 옐친파가 압승을 거두었고 이 기세를 타서 1996년 대선에서 엘친이 실각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언론플레이와 올리가르히 언론의 옐친 밀어주기 작전으로 인해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정권교체 직전의 상황에 까지 오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제1차 체첸 전쟁 패배와 경제 위기 등으로 러시아가 혼란에 빠지자 의회의 주도 아래 옐친에 대한 탄핵을 한 번 더 시도하려다가 간신히 부결되기도 했다. 그래도 옐친은 블라디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은퇴했고 후계자로 지명되어 새로운 대통령이 된 푸틴이 승승장구하면서 사후에 격하당한 이오시프 스탈린과는 달리 말년에 정치적으로 격하당하는 꼴이나 감옥에 가는 꼴을 당하지 않고 평온하게 생을 마칠 수 있었다.
한편 최고회의 지도자들도 의외로 크게 처벌받지는 않았다. 대부분 관대하게 사면받거나 짧은 형기만 복역하고 출소 한 이후 다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연방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몰락시킨 사건이며, 나아가 러시아와 서방 세계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기존보다 권력을 강화시키며 독재를 하기 시작했고, 옐친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새롭게 러시아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이 24년째 러시아 권력 1인자로서 자리잡으며 옐친 시절보다도 더 길고 강한 독재를 하게 되며 러시아의 민주화 가능성이 현격하게 낮아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93년에 이루어진 러시아 연방 헌법 국민투표인데 투표율은 고작 54.8%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국민들이 1991년 처음 태동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고작 2년만에 냉소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옐친의 국정을 보면서 국민들이 크게 실망했고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개혁적 자유주의가 아닌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통치를 하면서 러시아는 민주주의지수가 처음 발표된 해부터 지금까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을 탄압하고, 선거를 대놓고 조작하는 등 러시아 정치 체제를 형식만 갖춘 허울뿐인 민주주의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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