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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세워진 조동종(曹洞宗) 소속 사찰



박문사(博文寺, 하쿠분지)는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업적을 기리고 그를 추도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 박문사에서 발행한 팸플릿 「博文寺の槪要」에서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설립 목적을 명시했다.



1932년 6월 사이토(齋藤實) 총독 때에 착공하여 1932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사망 23주기 되는 날에 준공되었으며, 낙성식에는 우가키 가즈시게(제6대 조선총독: 宇垣 一成)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 천 여명이 참석했다. 박문사 본당은 일본인 건축가 이토우 추타(伊藤忠太, 1867-1954)가 설계한 철근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수세식 화장실에 온수난방까지 완비하여 지어졌으며, 정문은 경희궁 흥화문을 이축, 공수간(주방 건물)은 경복궁 준원전을 이축, 종루(鐘樓)는 석고전을 이축해 사용했다.


박문사는 사실상 당시 총독부의 조선종교정책, 특히 불교정책을 막후에서 수립했던 사찰이었다. 초대 주지는 스츠키 텐잔(鈴木天山, 1863-1941)으로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주지를 재임했으며, 2대 주지는 우에노 순에이(上野舜穎, 1872-1947)로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약 10년간 주지를 재임했다. 2대 주지인 우에노 순에이는 1940년대 조선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던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창화






박문사(博文寺)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사찰이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 곳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박문사는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에 완공되었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와 이광수최린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그외 천여명의 참석하였다.[1]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발기하여 세워진 소토슈 사찰로 건평은 387평이었다. 설립 목적은 "조선 초대총감 이토 히로부미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박문사 건축에는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이 사용되었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이전하여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천황과 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1937년에는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하였다.[1] 1939년에는 이 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이용구송병준이완용 등 한일 병합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용구의 아들인 이석규가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이광수와 최린윤덕영 등 약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철거되었고, 박문사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현재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참고자료

각주

  1. ↑ 이동:  권기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알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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