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Baekje Historic Areas | |||
국가 위치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등재연도 | ||
등재기준 | (ii)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 |
武寧王陵 / Tomb of King Muryeong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1. 개요[편집]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무령왕의 무덤으로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면 송산리 고분군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며,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기 때문에,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분에 해방 이후 고고학 최대의 발굴로 기록되었다. 또한 중국 양(梁)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양식의 건축으로 현재까지 고분 연구에도 대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어수룩한 발굴 때문에 후회가 가득한 발굴로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백제의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석판[1]이 발견된 점이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도굴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나라의 상호 간에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2.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편집]
1971년, 기존에 발견되었던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을 전혀 당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굴되어서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통 피장자의 신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도록 만들어진 다른 고분과는 달리 이 왕릉은 내부 석판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피장자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한 마디로 고분 중에서도 무덤 주인이 자기 이름을 대놓고 쓰고 죽은 희귀한 케이스인 셈이다.
무령왕릉 입구 진입 직후의 상황. 통로 앞에 석수와 지석이 놓여 이곳이 무령왕의 능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손으로 한 발굴이었음에도 과정이 너무 처참했다. 도굴이 한 번도 되지 않은 귀중한 왕릉을 발굴하였지만, 현장 사진을 온전히 찍어두고, 보통은 몇 년은 걸릴 법한 발굴 조사를 겨우 하룻밤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잔 유물들을 자루에 쓸어담았다는 증언도 있다. 비록 유물은 다 챙겼지만,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의 배치 현장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도 너무 부실했다. 남아있는 자료는 급하게 끝낸 부실한 실측자료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조악한 사진 뿐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한국 고고학계의 최고의 발굴인 동시에 최악의 발굴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발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모두 크게 후회하고 있으며 무령왕릉 발굴 책임자이자 한국 고고학계의 거물이었던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는 후일 자신의 수기에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밝힌 바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일제강점기 국내의 유적 발굴은 전부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의 한국 고고학계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커 왔으며, 무령왕릉의 발굴 시기에는 발굴자들 역시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와는 거리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모든 고고학적 발굴을 일본인이 독점하다보니 한국의 발굴기술은 전무한 상태였다. 독립 직후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날 때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일본인 발굴 전문가 한 명을 거의 반 강제로 억류해서 그 사람한테 기술을 배웠을 정도.[2] 그러나 무령왕릉 발굴은 1971년의 일로써, 1945년 해방 후 26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일제에서 전수받은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 고고학계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희대의 발굴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태도 역시 지금으로 말하면 기레기 소리를 들어도 무방한 게 아니라 이쯤되면 기레기 소리 안 나오는 게 이상한 개막장들이었는데 유물이 발견되자 어떻게든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는 식으로 이기적인 행태를 보였으며, 그 중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하기까지 하였다. 한 마디로 사건 현장이 전혀 통제되지 않았으며, 유물이 훔쳐질 수도 있었기에 조급해진 발굴자들은 급한 마음에 유물을 쓸어 담았던 것이다.
석수 유물을 나무 상자에 올려놓고 그대로 꺼내는 상황. 당시엔 취재진과 발굴팀, 구경꾼들이 한데 뒤엉켜 불야성을 이루었다.
게다가 유물 이송과 보존 과정에서도 발굴조사단과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1970년대 당시 공주박물관의 시설이 미흡해서 서울로 이송하여 보존을 해야 했는데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공주읍의 주민이 몰려와서 단 한 점도 서울로 가져가게 할 수 없다고 농성을 벌였으며, 이에 발굴단은 "유물이 삭아 없어지면 당신들이 책임 질 거냐"고 응수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 새로운 국립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대부분의 유물은 공주로 다시 돌아왔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왕릉을 훼손했다고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전화로 발굴단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들어왔다.죽일 수 있는 패기나 있나 모르겠다[3]
철야발굴 상황. 딱 보아도 발굴팀과 취재진이 어수선하게 뒤엉킨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낭설도 돌았다. 고대 왕릉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보고되자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물을 보고 싶어서 발굴을 독촉했다고 하는 데 이 사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당시 유물을 서울로 들고 간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유물을 보자기에 싸서 "시외버스"를 이용 서울로 올라갔다는데 발굴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했더라면 별도의 차량을 이용했을 것인데 발굴 이전까지는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헬기로 옮겼다는 버전도 있음.) 심지어 유물을 몇 점 가져와보라는 전화를 해서 가져온 유물 중 팔찌를 보고 "이거 순금인가?"하고 접었다 폈다 하였다는 낭설이 있다.(자매품으로 천마도 훼손 떡밥도 있다.) 위의 일과 결부되는데 박정희 본인이 직접 불렀다면 시외버스를 타고 올라 갈 일이 없을 것이다.
현재는, 김영배 관장과 김원룡 선생이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과 공명심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청와대에 유물을 보여주러 갔고, 유물에 무지한 박정희가 팔찌를 접었다 폈다 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영배 관장과 함께 청와대로 간 김원룡 선생의 수기에는 '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라고 적고 있다.
박정희는 이때 한 번 본 것이 전부인 것으로 고고학 관련 유물에 무지했을 것이고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일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 단원들에게 금일봉을 무려 100만원[4]씩이나 지급하는 등 어느정도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유물이 나오면 보존처리는 뒷전이고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바빴고 거기서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다는 점이나 이후 신라 궁터에 호텔을 지으라는 지시를 하기도한것으로 미루어 고고학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기레기무개념 기자들은 밀고 들어오고, 인근 주민들은 고분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주변에 우르르 모여들고, 사건 현장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였고, 마음이 급해진 발굴단 중 한 사람은 곡괭이질을 하다가 자기 발등을 찍어버리는 웃지 못 할 일들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종합하면,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발굴단도, 기자도, 주민들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숙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결국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미숙한 탓에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발굴 관계자들은 평생 이 졸속발굴을 후회하며 살고 있고, 당연하지만 현재까지 해외 고고학계에서도 무령왕릉의 졸속 발굴 얘기만 나오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발굴 방식이라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물론 무령왕이라는 백제왕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거의 도굴에서나 가능할 법한 졸속 발굴로 인해 죽은 무령왕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을 터.
발굴 후의 관리도 엉망이라 습기가 차고 붕괴 위험도 있어 1997년 7월 15일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고분군 모두 영구폐쇄되었다. 유물의 출토상태를 두고 도굴이 한 번쯤은 있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5]
참고로 앞선 내용처럼 일제강점기 시절의 국내 유적은 일본인들이 전부 발굴과 연구를 독차지했는데 공주 일대의 무덤을 발굴한 가루베 지온(輕部 慈恩)의 경우에는 공명심만 가득한 반면에 고고학적 방법론에 밝지 못한 아마추어였던 점이 문제였으며, 결정적으로 발굴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결과적으로 도굴꾼들이 무령왕릉을 손을 못 댄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6]
2.1. 번외 : 무령왕릉의 저주?[편집]
투탕카멘의 저주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령왕릉도 발굴과 관련된 괴담이 있다. 발굴 당일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고, 이후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잦은 사고를 당하던 중 김원룡 단장은 빚에 몰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남의 차를 빌려 무령왕릉으로 가다 아이를 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김원룡 단장은 아예 유서를 연구실 책상머리에 붙여두었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의 부실 발굴과 겹쳐져 발굴 관련 당사자들에게 마음의 큰 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 편찬한 <한국생활사박물관>4권 백제생활관에서도 이 내용을 책 한 켠에 실어놓았을 정도.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발굴 관련자들은 도굴꾼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며 자책했다고 한다.
다만, 발굴현장은 무슨 유적의 저주니 가져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나기 좋은 환경인 것은 맞는다. 일단 전면발굴을 할 경우 나무를 모두 제거해서 비 오면 토사 쓸려나가기 딱 좋은데다, 가끔 지하 저장고나 무덤 또는 구석기유적은 수 m 이상 지하로 파 내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이 벽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이런 벽들은 층위를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며 시간도 부족해서 안전시설을 설치할 여유도 없다. 게다가 지하로 내려가는 방법도 사다리를 타는 것도 있지만,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흙을 퍼내기 위한 외발수레를 사용하거나 흙으로 만든 계단 이용하는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상당히 잘 무너진다. 사실 사다리의 경우도 대부분 사진 찍는데 사용하는데,,,이 방법이란 게 A자 사다리 맨 위에 올라서 두 발로 똑바로 서서 찍는다... 레알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 엄청 무섭고, 그게 없어도 무서우며, 아래 있는 사람이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고 사다리 흔들리면 비싼 카메라와 같이 떨어져서 사고난다. 심하면 포크레인 삽등을 타고 높이 올라가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7]
고고학 현장을 다루는 책에서는 이런 안전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상당히 지적하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발굴 인부와 연구자들이 안전모도 착용하지 않는데다. 안전시설은 더 더욱 없으니.... 사실 고고학 현장에서 사고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문화재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대부분 매몰 사고이며, 이러한 매몰사고는 안전모가지고는 막을 수 없다. 왜 매몰사고냐면 건설현장과는 달리 문화재 현장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는 굴착작업이 주가 되며, 얕게는 10~50cm, 깊게는 5m 이상 지하로 파고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면 토벽이 무너지는 붕괴매몰사고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문화재 현장이나 상급기관(문화재청)에서 권장하는 안전장구는 고작 안전모 뿐이다.
여담으로 박정희는 2년 뒤인 1973년 천마총 발굴 시에 발굴현장을 방문했는데, 그가 도착하기 직전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워놓은 천막이 갑자기 무너졌다고.(...)
3. 출토 유물[편집]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관 조각들에서 일본산 금송(金松)과 삼나무 재질이란 것이 밝혀졌다.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며, 일본에서 목재를 수입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왕의 다리를 받치는 족좌와 왕비의 머리를 받치는 목침이 출토되었는데,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으로 장식했고, 왕비의 것은 붉은 단청과 금칠을 했다. 고대 사회에서 옻칠 > 단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물.
2009년 12월 8일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던 뼛조각 4개가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되었다. 왜 이게 38년만에 발견되었는지는 당연히 위에 서술했듯이 발굴이 개판상태여서 바닥에 있었던 유물들을 자루로 봉투에 쓸어담다 이런 일이 생긴것이다. 오죽하면 이 뼛조각을 발견한 국립중앙박물관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억울하다'라고 할 만큼 이 무령왕릉이 발굴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4. 무령왕릉지석[편집]
피장자를 무령왕과 무령왕비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묻힌 지석 덕분이다. 지석이란 사자의 신원이나 묘의 소재 등을 기록하여 함께 묻는 것을 의미한다.
2매가 출토되었으며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묘지 등을 기록한 장방형의 석판이다. 왕의 것과 왕비의 것으로 구분하는데 크기는 세로 약 35cm, 가로 약 41cm, 두께 약 5cm이다.
무령왕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곳에서 발견된다(추측이 분분했으나 중국 남조의 무덤에서 유사례가 발견되어 도교의 주문으로 밝혀졌다. 유사한 사례로는 ‘急急如律令’, ‘有天地敎如律令’, ‘有私約如律令’등이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해석한다면 천신으로부터 (무덤에 쓸) 땅을 매입하였으므로 속세의 율령(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유사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종율령'과 똑같은 구절은 아직 없기 때문에, 아직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있다.). 무령왕비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으로 되어있다.
왕비가 왕보다 후에 죽었다. 따라서 왕비의 지석이 제작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먼저 왕의 사후 27개월 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장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능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고, 후에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적은 지석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새겼을 것이다.
왕비의 묘지에서 빈전으로 '유지'라는 곳이 언급된다. 시신은 사후 즉시 능에 안치되지 않고 일정기간 다른 곳에 두는데 그곳이 빈전이다. 마침 공산성 서쪽에서 빙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된 바, 이 유지=빈전이 정지산의 빙고 유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5. 송산리 고분군의 조사 기록[편집]
현재는 무령왕릉까지 총 7개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지만 일제시대 때 조사에서는 13개의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는 30여개의 고분들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고 모두 일제 강점기에 도굴당하고 조사되었다. 특히 1호분부터 5호분까지는 이미 1920년대 조사 이전에 도굴당했으며 6호분은 1933년에 가루베 지온에 의해 도굴당했다. 일제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 고분군을 1936년 중요문화재로 지정했고 광복 후 1963년에는 사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되었고 주인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어 피장자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고분군에 누가 묻혔는지 어림잡아 짐작하면 다음과 같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무령왕릉), 곤지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 : 송산리 고분군의 가장 위에 위치한 적석유구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네모난 모양을 하고있다. 목관을 놓았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아놓았다. 내부에서는 백제토기들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아서 개로왕의 가묘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제사 유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분군 위쪽에서 제사를 지내나???)
1호분: 현재 1호분과 4호분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3년 조사 때는 4호분 또는 5호분으로 명명되었으나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하면서 1933년 1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조사 전에 이미 봉토가 거의 완전 유실되었고 도굴로 파괴되어 천장과 동벽의 일부가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곡옥 1점, 대도 1점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2호분: 현재 동쪽에서 두 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에 3호분으로만 명명되고 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조사하면서 2호분으로 재명명했다. 이미 도굴로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1호분과 축조 방식이 비슷하다. 내부에는 강자갈을 깔았는데 도굴로 교란되었고 수습조사에서 일부 유물이 수습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은 입구에 토기 5점이 있었으며 철제대 1점, 철제창 파편 1점, 철촉 3점, 관에 사용된 쇠못 다수가 수습되었으며 순금 귀걸이 1쌍과 구슬 2점이 수습되었다.
3호분: 현재 서쪽에서 두 번째로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2호분으로 명명했지만 가루베 지온이 1933년 재조사하면서 3호분으로 재명명했다. 봉토는 유실되었고 조사 전에 이미 도굴 구멍이 있었다. 이 도굴 구멍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라서 이 구멍을 통해 조사했다. 출토된 부장품은 금동제 꾸미개 1점, 금동제 허리띠 파편 2점, 금동제 허리띠금구 1점, 말띠드리개 1점, 화형장식구 1점, 쇠못 100여점, 쇠촉 8점이 수습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루베 지온이 재조사했을 때는 소나무 관 파편 다수, 철제 대도 2점, 은제판 조각 1점이 더 수습되었다.
4호분: 현재 가장 서쪽에 있는 무덤으로 1927년 조사에서는 1호분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다가 1933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4호분으로 재명명되었다. 조사 전에는 봉분의 흔적만 남아 있었지만 도굴에 의해 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부장품으로는 은제 허리띠 장식 2점, 은제 자루끝장식 1점, 순금 장식구 11점, 금동 장식품 잔편 1점, 철도금 장식구 잔편 약간, 은제 장식구 2점, 철창 파편 점, 철촉 43점, 금동 고리 1점, 장식못 124점, 철편 17점, 칠기 잔편 약간, 철제 고리 잔편 약간, 얇은 은박판 잔편 약간, 금동 장식구 잔편 약간, 금동 파편 약간이 1927년 조사에서 수습되었다. 이후 가루베 지온의 재조사 때 쇠못 7점, 금동의 각진 추형식 유물 1점, 나무관 파편 1점이 더 수습되었다.
5호분: 동쪽 구릉에서 약간 서쪽 지역, 즉 6호분과 무령왕릉 근처에 있다. 6호분은 서쪽에, 무령왕릉은 후방에 있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다. 1932년 이 지역의 고분 관람을 위한 작은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을 가루베 지온이 조사했는데 이미 조사 이전에 도굴되었으며 가루베 지온은 이것을 5호분으로 명명했다. 가루베 지온은 5호분의 후방에 있던 무령왕릉을 사신 가운데 현무에 해당하는 인공 산으로 보고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것은 6호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해치운 것을 볼 때 정말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이고 관대 두 개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로 보이며 벽면은 돌로 쌓아 올렸고 천정을 큰 판석으로 마무리하여 서울 방이동 고분군의 형태인 궁륭형 석실과 비슷한 모양새를 띄고있었다. 천장 일부는 도굴로 일부 파괴되어 있었고 출토된 부장품은 순금제 말모양 장식구 1점, 순금제 나뭇잎모양 장신구 8점, 순금제 다이아몬드형 장식구 14점, 순금제 달개장식 1점, 순금제 꽃모양장식 1점, 산호옥 1점, 은못 35점, 금동장식못 50여점, 토기항아리 1점, 쇠못 10여점, 둥근고리 큰칼 파편 1점, 쇠촉 11점, 유리구슬 1점, 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출토되었다. 비록 도굴되었지만 금제, 은제 장식품들과 나무널에 사용되었던 호화로운 장식용 못들이 다소 수습되어 위상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또 토기항아리에서는 은제 꽃장식 못 6점이 나와 흥미를 끌엇는데 이것은 도굴꾼이 가져 가려고 담았다가 가져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아사히신문 조각과 양초, 성냥, 호박으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 발견되었는데 파이프를 물고 신문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을 시켜 도굴을 하게 한 어느 일본인 도굴꾼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에라이 천하의…또한 무령왕릉 바로 근처라는 점과 무령왕릉의 약간 위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바로 선대왕이었던 동성왕과 동성왕비의 무덤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사실은 알 수 없다.
6호분: 무령왕릉 이전에 발견된 백제 최초의 벽돌무덤이자 벽화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다. 1932년 송산리 고분군 정화작업 현장에서 배수로를 파다가 발견된 6호분은 일찍 발견되는 바람에 가루베 지온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가루베 지온은 천장이 파괴되었고 이미 1호분부터 5호분까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도굴되어 출토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마구잡이로 무덤을 도굴하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쓴 다음 조선총독부에는 보고서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덤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더 이상 조사를 빙자한 도굴이 불가능해지자 1940년 강경여고로 전근갈 때까지 송산리 고분군을 관광하러 오는 일본의 높으신 분들과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를 자처했다. 결국 광복 후에는 그동안 수집하고 도굴한 콜렉션을 집이 있던 강경에서 빼돌려 트럭에 싣고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간 다음 역시 도굴광이었던 대구 남선전기 오구라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다. 6호분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존재한다. 그도 그럴 듯이 무령왕릉과 매우 똑같은 벽돌무덤이서서 무령왕과 매우 밀접한 인물이 피장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6호분의 피장자로 추측되는 사람은 총 3명이다.
1.동성왕설
6호분의 피장자가 동성왕이라는 설이다. 벽돌무덤은 남제의 양식이고 동성왕때 남제와 교역을 시작했으니 이때 벽돌무덤의 양식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6호분은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동성왕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왕비와 같이 합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호분) 따라서 근거와 주장이 희박하다.
2.성왕설
6호분의 피장자가 성왕이라는 설이다. 성왕때에는 벽돌무덤의 양식이 이미 정착(무령왕릉)되었고 6호분 또한 무령왕릉 보다 나중에 축조됐다고 추측되는 것으로 보아 근거는 일부 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왕은 사비로 천도를 한 첫 왕(사비시대의 첫 번째 왕)이다. 성왕이 송산리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지만 현재 성왕릉은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3.성왕의 모친(대부인)설
그렇다면 6호분의 피장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동성왕과 성왕도 아니라면 추정되는 사람은 성왕의 모친 밖에 없다. 현재 가장 강력한 설이다. 6호분이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되는 점과 한 명만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점, 벽면의 사신도가 이 설을 더 뒷받침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선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나 전부 성왕 때 지어졌을 것이니 성왕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진왕제 하에서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으나, 왕이 즉위하게 되면 왕비 중에 1명을 택하여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오래 전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한 사람은 미리 자립위왕에 걸맞은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자립위왕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즉위와 동시에 그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면 된다.(무령왕 초기에는 귀족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무령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왕후를 맞았을 확률이 높다.)
왕과 왕비를 같이 합장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왕비가 자신의 친모라면 고민할 필요없이 아버지인 무령왕과 같이 합장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친모가 공식왕후가 아니라면 누구를 아버지인 무령왕과 같이 합장해야할까? 일단 공식적인 왕후를 합장하는 것이 법도이다. 하지만 성왕의 친모 역시 왕비에 버금가는 좋은 예우을 받아야했다. [8]
6호분의 사신도인 현무도가 그려진 벽이 무령왕릉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보아 자신의 친모를 아버지와 따로따로나마 죽어서라도 가깝게 붙여놓으려는 성왕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고분의 주인이 성왕의 모친이라면). 또한 벽면의 사신도 또한 어머니를 위해 성왕이 특별히 그리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천하의 개쌍놈 가루베지온 때문에 안타깝게도 진짜 고분의 주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6호분의 지석에는 성왕이 느꼈던 것이나 당시 왕실 상황을 알 수있는 기록이 남아 있었을 텐데 정말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호분: 1932년 송산리 고분군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으며 위치는 현재 1호분과 2호분 사이에서 남쪽 아래에 있었다. 현재는 위치가 사라졌으며 봉토는 유실되었고 내부도 도굴로 심하게 파괴되어 부장품은 거의 없었다. 다만 도굴꾼이 파낸 흙 속에서 극히 소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부장품은 소량의 구슬이 수습되었다. 또 내부에서는 구슬 1점, 은제 꽃모양장식 1점, 은제 구슬 7점, 작은 구슬류 1점, 금동 및 은제 판상장식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
8호분: 현재 1~4호분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했으며 4호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이 무덤은 1933년 조사에서 4호분보다 매우 작아 4호분에 딸린 배총으로 여겨졌다. 출토된 부장품은 나무고나 파편 몇 점, 백제토기 5점, 은제 팔찌 2점, 산호옥 6점, 흑색 구슬 4점, 작은 구슬 1000여점, 쇠못 몇점이 수습되었다. 이 중에 구슬 1000여점은 목걸이들로 보인다.
29호 무덤: 1933년 6호분 보수 공사 때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형식은 알려진 게 없다. 출토된 부장품도 거의 알려진 게 없는데 극소수의 구슬류가 출토되었다고만 전한다.
파괴 고분: 현재 1~4호분 동편 맨 끝에 위치한 고분으로 1927년에 조사되었다. 이미 도굴로 천장이 붕괴되어 내부는 흙으로 가득했고 봉토도 사라져 고분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이 고분은 1호분과 2호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부장품은 토기 2점, 연옥 269점, 유리구슬 27점, 금동제 띠고리 1점, 금동 방울 1점, 나뭇잎모양 장식 1점, 손칼 1점, 금동제 장식구 파편 1점이 수습되었다.
가루베 지온은 1969년에 현재 공주고등학교인 공주고보 제자였던 이성철에게 국제우편으로 흑백사진 28장을 보냈다. 무슨 심산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28장 중에는 그가 도굴한 6호분의 현장 사진과 실측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문화재청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이를 기증했는데 이상한 것은 1번부터 26번까지 매겨 놓은 사진 중에 10번 사진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정컨대 가장 중요한 무덤 내부의 유물 사진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11번 사진에는 희미하게나마 유물로 보이는 물체가 보이고 관대 아래를 찍었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더구나 도굴된 다른 무덤에서는 극히 소량의 부장품이라도 수습된 것으로 보아 6호분에서 잔편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은 그가 도굴하고 깨끗이 치웠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가루베 지온은 1901년 생으로 일본 야마가타현에서 태어나 1925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왠지 공주로 가서 공주고보에서 교사 노릇을 하며 공주와 부여 지역의 백제 유적과 고분을 샅샅이 뒤지고 도굴한 다음 연구를 했다. 1970년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없다고 우겼다. 1959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문화재 반환위원들이 일본으로 직접 찾아갔으나, 그런 거 없다라고 했고 1970년 명지대학교에 강연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관했다. 가루베 지온은 이 유물들을 연구해서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라는 책을 저술했고 결국 그는 1970년 그대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족들도 끝까지 가져온 게 없다고 우기다가 2006년에서야 유족들이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는 데에 그쳤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는데 만약 그가 이때까지 살아 있어서 그 얘기를 들었더라면, 아니 저 세상에서 통곡을 했을 것이다.
가루베 지온은 근대 초기 단계에 있어서의 백제문화 전문가에서 충남 향토학자로 조명받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미친 소리!그러나 그는 비전문가였던데다가 무분별한 도굴로 백제 유적을 파괴하고 유물을 훔쳐간 도둑이라는 것은 유념해야 한다. 은행강도더러 금융전문가라고 칭찬하는 셈
6.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한중일 삼국이 나오는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중저렙 사냥터 무령왕릉으로 등장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왕릉의 발굴당시 이야기를 다뤘는데 역시나 자신들의 실책임을 자책하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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