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2024. 6. 1. 14:15

시간여행가 기억보관소/사라진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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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발생일
1987년 3월 22일
발생 위치
부산직할시 북구 주례동 산 18번지
유형
납치, 강제 수용소, 무자유 노동
원인
원장 개인의 금전적 이득(지원금 절취 및 포탈)
인명피해
사망
531명 이상
실종
n명
부상
n명
구조
n명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부산시, 더 나아가 정권에 의해 일어난 인권유린, 국가폭력, 학살 사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학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1987년 말까지 수용자 학대가 자행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의 묵인 방조 혹은 협력 하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장애인, 부랑자 단속이 극심했다.[1]

약 12년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피해자 수는 최소 513명(박인근의 주장)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체는 암매장 또는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2022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라 공식 사망자는 657명으로 늘었다.

수천 명의 원생들 중 70%가 일반인이었으며, 형제복지원 직원들에 의해 납치, 구금되었다. 당시 납치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이 적극 협조하였기 때문에 원생들은 탈출해도 공권력에 의해 다시 잡혀들어갔다. 게다가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전두환도 뒷배를 든든히 책임졌으며, 따라서 피해자들은 한 번 붙잡힌 이상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원장 및 관리자급 직원 4명이 체포되어 특수감금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윗선의 지시로 살인죄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또한 반정부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의 지시로 2년만에 석방되었고, 원장은 2011년 사임을 전후하여 치매를 앓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리며, 대한민국 내부에서 같은 민족인 한민족이 한민족을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점은 사실상 나치의 아우슈비츠나 소련의 굴라그 수준의 최악의 사건이다.









1. 서로 서로 도우고 사랑하자
2.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자
3. 정직하고 충실한 일꾼이 되자
- 형제복지원의 원훈

형제복지원은 육군 부사관이던 박인근이 1962년에 장인으로부터 인수한 감만동 형제육아원(1960년 개원)을 모태로 한 개신교계 부랑인/부랑아 보호시설로[2], 인수 후 용당동으로 이전했다. 1965년에 사회복지법인화하고 부산시로부터 아동복지시설 인가를 받았다. 1971년에는 기존 목적이던 유아보호시설에서 부랑아 보호시설로 변경했고, 박정희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아 단속을 위해 발표한 1975년 내무부훈령 제410호에 근거하여 부산시 부산진구 주례동 산18번지[3]의 토지를 사서 이듬해에 준공했다. 1979년에 형제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83년부터 부랑아/부랑인 직업보도 업무를 개시했고, 이듬해에는 정신요양원을 열었다. 기관지로는 월간 <새마음>이 있었다.

1975년 이후 12년 동안 국고 횡령, 아동 강제 노동 등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를 자행해 오다 1987년 3월 22일에 시설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통금 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4] 원생들을 중대나 소대별로 나누어 관리하고 원장-부원장-총무-중대장-소대장-조장-조원 순으로 수직적으로 통제하는 군대식 구조를 지녔다. 시설 측은 탈출을 막기 위해 경비원 13명과 경비견 13마리를 풀어 24시간 감시했으며, 축사 주위에 철조망 및 초소 2개도 설치했다.

시설 측은 미성년자 유인 약취, 납치, 폭행을 동반한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에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으면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온 피해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1984년 개금국민학교가 시설 내에 분교(통칭 개금분교)를 차리기는 했으나 일부 아동들만 뽑혀 통학했으며, 정상적인 교과 과정은커녕 시설과 박인근 원장을 찬양하는 교육만 받은 데다 주의가 산만하면 교사와 총무계장이 가차없이 폭행을 가했다. 같은 시기 야간중학교가 차려지긴 했으나 1985년경에 폐교됐고, 개금분교와는 달리 미인가 교육기관이라 원생 명단이 없다.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 그리고 일부 남성[5]의 경우에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대부분 외부로 판매되었고, 국가보조금과 작업 수당까지 갈취되어 원장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며 신민당 실태조사단 1차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수용자들의 수당은 1일 3~5백원, 장애인들은 2백원, 요양원 입원자는 3일에 버스 토큰 1개씩이었다.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몇몇 적금통장이 만들어졌지만, 복지원에서 나가려면 도망치거나 시체가 되는 방법밖에 없다시피 했으니 피해자들이 그 돈을 받는 일은 없었으며, 설령 탈출을 시도하려 해도 경비원들에게 잡혀 두들겨맞았다.

정신요양원의 경우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원칙적으로 의사 2명의 진단과 경찰 입회 하에 입원을 해야 했으나 이들 중 70%가 변칙 입원된 일반인들이었다. 복지원에서도 악명높은 부랑인을 실장 또는 소대장으로 뽑아 통제하고 입원자 가족들에게 월 10~15만원을 받으면서도 치료라곤 1일 3~4회씩 신경안정제만 놔줘서 중독상태에 놓인 피해자가 흔했다.(참고)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몸을 뉘일 허술한 공동 숙소와 빈곤한 식사 뿐이었는데, 당연히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역시 모두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질병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으며, 지속되는 구타와 고된 작업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사망하였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 수만 513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6]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원에 팔려나갔다. 수천명의 원생수 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 가족이 있고 멀쩡한 직장이 있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잡혀가서 4일만에 '폐렴 및 합병증'으로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을 남긴 채 사망해서 나오는 식이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이 한 개인의 부도덕 문제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부산시 공직 사회가 공조했다는 것이다. 소위 소대장이라 불리는 감독관 중 대장격인 왕소대장이라고 불렸던 이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시, 부산시 사회복지과, 부산경찰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시설 관리를 전문지식이 없는 북구청 주사보 1명이 맡았으며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 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 줄 테니 경찰차에 타라" 하고는 복지원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김주호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사부장관에게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훗날 김영삼 정부 시절에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수사 철수를 지시하는 등[7] 부산시 공직사회가 전체적으로 공모한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 역시 부검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 원인을 고의로 날조하는 등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병리과 의사[8]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가 부검을 맡는 등 의료행정 역시 개판이었다. 내무부훈령상 관할 지서/파출소장이 1주에 1회 순찰토록 했음에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현실에 나타난 지옥도로, 피해자들이 같은 부산시민인데도 사회의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감자들을 같은 사람으로 봤는지도 모르겠지만...



박인근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4.19 혁명 당시 육군모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다고 한다.[9] 1960년 부산 감만동에 형제육아원(1971년부터는 형제원, 1979년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각각 변경)을 설립/운영하며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10] 횡령, 착복하여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다. 또한 자신의 땅[11]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고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쯤 되면 북한이랑 다를 게 없다. 이를 바탕으로 1981년 국민포장 석류장, 1984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온갖 수훈을 받고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으며, 1982년에는 MBC에서 이 시설을 다룬 2시간짜리 대형드라마 <탄생(극본 심영식, 연출 이병훈)>이 방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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