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삼각산 기슭에 있는 절










그 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성종2년(1471년) 덕종의 부인이 되는 인수대비가 “이 절을 처음 지을 때 급히 지어 재목이 좋지 못하고 쓰임새가 정밀하지 못하다”하여 판내시부사 이효지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해 2월에 불사를 착공하여 10월에 낙성하였는데 이듬해 4월 초파일에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푸니 인근의 승려 수만여명이 절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임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새로 중창한 절의 규모는 총 119칸으로 단청이 아름다워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덕종, 예종의 원찰로서 오랫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왔다. 이는 “성종실록” 22년 10월 27일자 기사에 “호조에 전교하여 정인사에 봉선사의 예에 의하여 쌀 30섬과 면포, 정포 각각 50필을 하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등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4일자 기사에는 정인사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니 “능침(陵寢)에 가까운 절이라 하여 즉시 경기감사 안윤덕과 형조참판 박열을 불러 금표로부터 바로 가서 국문하게 하고 놀란 영혼들을 위해 위안제를 지내도록 하라”는 기록도 보인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되어있는 아미타좌상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하였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하며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고종이 월초스님에게 소원을 물으니 스님은 아무 소원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허면 스님에게 벼슬과 녹봉을 내리면 어떻냐?”로 물으니 이에 스님은 “출가한 자가 국가의 녹을 받으면 외람된다”고 사양하고 다만 서오릉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향화(香火)가 끊어진 것이 애석하니 원컨대 근교에다 정사(精舍)를 내리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다며 수국사의 중창을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자 고종은 “효심과 신심은 본래하나(孝心信心元無二)”라 하고 어명을 내려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6.25동란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역대 주지스님들이 계속하여 중창불사를 거듭해오고 있으며, 2005년에 수국사 주지로 부임하였던 토진스님께서 부임당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과 종단에서 조차 파악하지 못한 부채 등 난마처럼 얽힌 사찰의 문제를 풀기위해 수국사가 안고 있던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으며 2007년 12월 전 조계사 주지셨던 원담스님께서 새로이 부임해서 사찰의 합리적 운영을 통해 수행과 포교 . 교육 등 전반적인 영역에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며 또한 서울시민과 모든 신도들에게 항상 열려져있는 공간으로 늘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며 다양한 법회를 열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있는 서울 서북부지역의 대표적 사찰이다. 


수국사의 황금보전 법당은 외9포, 내15포, 108평 규모에 청기와로 된 전통목조법당이며 법당 안밖을 기와 이외에는 100% 순금으로 개금불사하여 장엄한 도량이며, 아미타후불탱화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수국사 인근의 진관사, 삼천사, 서오능, 서삼릉, 상암동 소재 2002년 월드컵 주 경기장 등과 연계하여 관광하실 수 있습니다.

수국사 관광을 원하시는 분은 전화(02)356-2001로 연락 주십시요.

관광을 희망하시는 분들께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국사는 예부터 유명한 기도도량으로써,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한가지 발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고찰입니다.

사찰이나 불교단체 단위의 참배(사찰순례, 방생 등)나 
기도를 원하시는 분은 전화(02)356-2001로 연락 주십시요.

참배나 기도를 희망하시는 분들께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신임주지 호산입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올해도 모든 불자님 가정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연기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삼라만상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물건이 내 앞에 있어 나에게 영향을 줄 때까지 그 존재의 배후에는 얼마나 많은 숨은 인연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나와 잘 맞고 조화를 잘 이루는 선연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고 불협화음만 생기는 악연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연과 악연의 사람들 때문에 계속 만나거나 상대해야 하고, 선연의 사람은 언제나 함께하고 싶지만 뜻하지 않게 헤어지고 맙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처음에는 좋은 인연이라 믿었던 것이 나쁜 인연으로 바뀌기도 하고 처음에는 나쁜 인연이라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좋은 인연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연이 선연 혹은 악연의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열심히 일한 농토는 정갈하고 보기 좋고 수확도 좋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인연은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가꾸어 나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연도 악연도 없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기 때문에 사물적 모습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 선연이 되기도 하고 악연이 되기도 하니, 모든 인연에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소승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도량인 수국사 주지로 인연맺음에 부처님 전어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또한 부처님 법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매월 21일간 우리말 금강경 특별기도를 봉행하여 부처님께서 그동안 베풀어 주신 자비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회향하여 선연을 맺고자 합니다.
하오니 수국사에 찾아오시는 불자님들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참다운 불자로서 불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생활화하여 불지견(佛智見)을 열어 나가게 되기를 간결이 바라마지 않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수국사 주지 호산








• 일요 법회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가정의 바른 생활을 부처님전에서 법문을 들으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날입니다.
 신중기도 (음력 초하루 오전 9시 30분) 
매월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전체 신도가 모여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한 달 동안의 무사고와 평안을 위해 부처님전과 우리를 보호해주는 신중(神衆)님 전에 기도를 모십니다.
• 보름 인등법회 (음력 보름 오전 10시) 
계는 우리를 재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바른 생활의 기준입니다. 
부처님전에 계를 외우는 포살을 통해 죄를 참회하고 바른 원을 다시 세우는 날입니다.
 지장재일법회 (음력 18일 오전 10시) 
돌아가신 조상님들과 일체영가를 위해서 지장보살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를 모시는 날입니다.
• 관음재일법회 (음력 24일 오전 10시) 
우리의 부름으로부터 응답을 해주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공양을 올리고 감사의 기도를 모시는 날입니다.
 
• 부처님 출가일 (출가재일 出家齋日) 
음력 2월 8일은 싣달타 태자께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으시고 수행의 길로 드신 날입니다.
• 부처님 열반일 (열반재일 涅槃齋日) 
음력 2월 15일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열반하신 날입니다.
• 부처님 오신 날 
음력 4월 8일은 고해에 빠져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룸비니 동산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 우란분절 (백중 伯仲) 
음력 7월15일은 수행하시는 많은 스님께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지옥문이 열리고 조상님 및 인연 있는 영가를 위해 천도기도를 드리는 날입니다.
• 부처님 되신 날 (성도재일 成道齋日) 
음력12월 8일은 6년 동안의 많은 수행과정을 겪으신 후 새벽 별이 환하게 빛나는 붇다가야 니란자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으신 날입니다.
 
• 인등기도 
부처님전에 등불공양을 올림으로서 꺼지지 않은 등불과 같이 지혜가 충만해지길 발원하며 공양을 올립니다.
• 새벽기도 
7일기도 혹은 21일 기도 혹은 100일기도 등 우리의 바램이 있을 때 기한을 정해서 일심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 당일축원 
우리의 일상사에 일어나는 일들을 부처님과 함께하며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감사의 공양을,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업장 소멸을 위한 공양을 올립니다.
• 생일기도 
생일을 맞이하여 항상 새로운 인연 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질병 과 재액을 없애 주길 바라며 부처님께 공양을 드립니다.
 
• 예불 : 아침(오전 4시), 사시(오전 10시), 저녁(오후 6시) 
불자들이 불.보살님께 예경(禮敬)드리는 의식을 예불이라고 합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님께 예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조석으로 반복되는 의식으로 모든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 천도재(薦度齋) 
재의식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천도(薦度)의 의미가 있습니다. 
천도재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보살님께 재를 올려 영혼들로 하여금 정토 천계(天界)에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재(齋)는 신구의(身口意) 3업(業)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의식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지은 업(業)에 따라 다시 생을 받습니다. 죽은 이를 위해 지극하게 재를 지내는 것은 죽은 이의 악업(惡業)이 소멸되어 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 49재(齋) 
49재는 칠칠재(七七齋)라고도 합니다. 죽은 이의 명복과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기 위해 올리는 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중유(中有)에 머물러 있다가 지은 업(業)에 따라 다시 생을 받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7일 간격으로 생을 받다가 7번째에 확정된 생을 받아 태어난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고인이 생을 받는 날에 재를 올려, 좋은 생을 받아 다시 태어나거나 극락 세계로 왕생할 것을 축원하는 것입니다.
• 예수재(豫修齋)
예수재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재입니다. 즉, 죽은 후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여 살아있을 때 미리 닦는 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저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진 빚이 있으므로 예수재를 지냄으로써 빚을 미리 갚는다는 뜻입니다. 보통 윤달에 지냅니다.
• 제사 및 차례 
모든 가정에서는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명절 마다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냅니다. 사찰에서도 돌아가신 분의 기일(忌日)에 맞추어 제사를 지내드리며, 명절 차례를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 도량이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이곳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랏일로 죽었어도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재를 올렸다.

현재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부처와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고, 석가모니 후불탱화와 비로자나 후불탱화, 아미타 후불탱화,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으며 지장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 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1027년(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1994년 11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6년 12월 30일 지하 1층, 지상 3층의 2동으로 된 복지관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 ‘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물로는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섞어 조각한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3m이고, 불상 높이는 2.6m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찬영(木庵粲英:1328∼1390)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

⑴ 경릉 :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좌측이 왕, 우측이 비의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 상례와 반대되고 있다. 이는 왕비가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⑵ 창릉 : 덕종의 아우인 예종(睿宗)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능이다. 왕릉·왕비릉이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고, 그 석물(石物)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전통적인 예에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고석(鼓石)의 무늬와 석난간 대석주 주두양식(石欄干 大石柱 柱頭樣式)이다.

⑶ 익릉 : 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좇고 있다. 능표(陵表)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다.

⑷ 명릉 : 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雙墳)으로 조영(造營)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상(陵制上)에 한 시기를 이루었으니 즉 그 제도는 《속오례의 산릉의(續五禮儀山陵儀)》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 후기 치장(治葬)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 산릉의(喪禮補編山陵儀)》의 기초를 이루었다.

⑸ 홍릉 : 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택조(宅兆)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허석(虛石)의 제도를 쓰고 능상석물(陵上石物)은 쌍릉(雙陵)을 예상하여 배치하여 놓고 있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능은 능상설(陵象設)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명릉(明陵)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에 독특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고 난간석주 주두양식(欄干石柱柱頭樣式)이 특이한 것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사적 제200호.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⑴ 효릉 : 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⑵ 희릉 :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⑶ 예릉 : 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 대중교통

- 시내버스 : 간선버스 702번 또는 광역버스 9701번 이용하여 선정고교 앞 하차 후, 길 건너편에 
.................수국사 안내표지판 따라 온다.
- 752, 751, 7022, 7720, 752, 751, 7022 선진운수 종점에 하차해서 도보로 5분 거리정도 올라오면 
수국사 이정표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 지하철 : 6호선 구산역 3번출구 서오릉방향 1km 지점에 위치 (10분정도 소요)


반응형

'건축물 > 법당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불교 조계종 개화산 약사사  (0) 2017.05.03
봉은사  (0) 2017.04.30
조계사  (0) 2017.03.31
대한 불교 천태종 서초구 관문사  (0) 2017.03.03
대한 불교 조계종 강서구 홍원사  (0) 2017.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