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삼각산 기슭에 있는 절
그 후 정인사는 연산군 10년(1504년)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다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광무 4년(1900년) 고종의 내탕금(內帑金)으로 현재의 위치인 갈현동 태화산(太華山) 자락에 다시 짓게 되었다.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고양정인사중창기(高陽正因寺重創記)에 의하면 처음 절을 지은 이는 판화엄대선사(判華嚴大禪師)인 설준(雪峻)스님으로 법당등 모든 설계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수국사는 한 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광무 1년(1897년) 3월 당시 북한산성 총섭(摠攝)으로 있던 월초거연(月初巨淵)스님이 진관사에 들러 불공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스님은 진관사 대웅전 구석에 봉안되어있는 아미타좌상앞에 하나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진관사의 스님이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풍우(風雨)를 면치못하여 가까운 우리 절에 모신 것이나 차나 향을 공양하지 못했다”고 하자 월초스님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불상앞에 불공을 드리고 수국사를 중창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광무 4년(1900년) 세자로 있던 순종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다급한 고종은 월초스님에게 세자의 쾌차를 빌도록 명하였다. 이에 스님은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에서 백일 나반존자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드린지 80여일만에 세자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어디가 아픈가?”하며 금침을 한번 놓는 사이 세자의 병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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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 도량이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이곳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랏일로 죽었어도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재를 올렸다. 현재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부처와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고, 석가모니 후불탱화와 비로자나 후불탱화, 아미타 후불탱화,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으며 지장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 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이후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1027년(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년(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1994년 11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고, 1996년 12월 30일 지하 1층, 지상 3층의 2동으로 된 복지관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 ‘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물로는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보물 제657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각과 음각을 섞어 조각한 독특한 작품이다. 전체 높이는 3m이고, 불상 높이는 2.6m이다. 그밖에 경내에는 대형 석조(石槽)와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찬영(木庵粲英:1328∼1390)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최근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경내에 옮겨 놓았다. ⑴ 경릉 :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좌측이 왕, 우측이 비의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 상례와 반대되고 있다. 이는 왕비가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⑵ 창릉 : 덕종의 아우인 예종(睿宗)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능이다. 왕릉·왕비릉이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고, 그 석물(石物)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전통적인 예에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고석(鼓石)의 무늬와 석난간 대석주 주두양식(石欄干 大石柱 柱頭樣式)이다. ⑶ 익릉 : 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좇고 있다. 능표(陵表)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다. ⑷ 명릉 : 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雙墳)으로 조영(造營)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상(陵制上)에 한 시기를 이루었으니 즉 그 제도는 《속오례의 산릉의(續五禮儀山陵儀)》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 후기 치장(治葬)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 산릉의(喪禮補編山陵儀)》의 기초를 이루었다. ⑸ 홍릉 : 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택조(宅兆)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허석(虛石)의 제도를 쓰고 능상석물(陵上石物)은 쌍릉(雙陵)을 예상하여 배치하여 놓고 있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능은 능상설(陵象設)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명릉(明陵)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에 독특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고 난간석주 주두양식(欄干石柱柱頭樣式)이 특이한 것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
사적 제200호.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⑴ 효릉 : 중종의 아들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제도로 썼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리었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⑵ 희릉 :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모시게 하였다. 그 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⑶ 예릉 : 국말(國末)의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능제도는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제도를 취하고 있으며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
• 대중교통 |
- 시내버스 : 간선버스 702번 또는 광역버스 9701번 이용하여 선정고교 앞 하차 후, 길 건너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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