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석전(石戰)은 한민족의 민속 놀이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 그대로 돌(石) 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옛 기록에 따르면 석전은 최소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매년 정초(正初)에 패수(浿水) 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서로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 세번 되풀이한 뒤 그만 둔다.
《수서》 〈고구려전〉




내가 조선에 당도한 첫 해 동안에 나는 전통적인 편싸움, 즉 석전을 구경할 흥미롭고 미심쩍은 특권을 누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은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지혜롭고 박식한 여자들일지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입국 이후 몇 주가 흐른 뒤에 하루는 우리집을 나서 친구를 방문하고자 가는 길에, 두 패로 나뉜 것으로 보이는 아주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는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내가 목격했던 석전의 전초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신랑은 나 혼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아주 고맙게도 끝까지 바래다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이내 돌과 던지는 무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조선인의 집에 대피하고자 뛰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기와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고 종종 담벼락 뒤로 우리들 몸을 숨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길모어 씨(Mr. Gilmore)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뭔가 어수선하고 동요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분명하게 평정이 이뤄지기를 기다렸고 그리하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은 우리들 중 성질이 급한 한 젊은 동포가 이 석전의 모습을 사진 찍으러 나갔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어느 냉정한 미국인 한 사람이 최근에 호랑이를 사냥하기 직전에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호랑이의 모습을 먼저 담았는데, 그것에 그가 경쟁심을 느꼈던 것인지 우리들의 젊은 친구가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그는 곧 모든 던지는 무기들이 조준하는 대상물이 자기이며, 이들 피에 굶주린 악당들이 완전히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운하기도 하고 불법적인 것이지만 6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기에, 지나치게 흥분하고 불안했던 그는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는 도망을 쳤다. 그가 쏜 총탄은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의 다리살을 파고 들어갔고, 그가 쓰러지자 다들 그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양쪽 무리 모두의 분노가 가장 격렬한 형태로 완전히 얼어붙은 젊은 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군중들은 분노의 외침과 더불어 그를 추격했다.

카메라와 외투는 내팽개쳐지게 되었고, 그는 미국공사관의 대피소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달렸는데, 간신히 이곳에 도착하니 헐떡거리고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총을 맞은 피해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벌금을 물고 몇 주 간의 투옥, 가장 엄한 견책, 그리고 이 나라를 떠나라는 완곡한 요청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상투의 나라 중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