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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뜻하고 독립문의 현판은 이완용이 쓴것이다.  



이완용은 당시 고종의 대리인으로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 현대에선 고종은 좌파예술인들이 하도 띄워놨는데 사실상 이완용은 고종의 대리인으로서 일본과 협상함



당시 일본은 100만명이 넘는 대군을 가지고 러시아 , 청나라를 차례로 이겼다. 이 전쟁을 한 이유는 조선을 합병하기 위해 -> 당시 영국의 소개로 일본은 세계 열강회의에 참석해 조선합병을 승인받음



당시 조선군대의 숫자는 8천명이었다. ,,,ㅋㅋㅋㅋ 이완용은 도저히 승부수가 없으니 고종의 대리인으로써 최대한 조선의 이익에 부합하게 개화하는 조건의 합방을함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수는 겨우 339명밖에 안 되었으며 450만명의 일본군 중 조선인 지원자의 수는 73만명에 달했다. 이중 조선인 장교는 24명이었는데 이들이 해방 후에 군 요직을 차지한다. 여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의 이유 때문에 2차대전 종전 후 조선의 이미지는 지금 매체에서 나오는 피해국이 아닌 전범지원국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독립군이 5만 명이라고 부풀려 반공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동학농민운동하면서 전국을 피폐하게 만든 전라도 사람들이 나중에 송병준과 일진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한일합방 '청원'을 하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식민시절동안 한국의 인구는 1700만명에서 2300만명으로 증가했다.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금지하기 전까지 조선인들은 만동묘<현재도 있음>라는 사당을 만들어 놓고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왔다. 



일제가 근대교육을 하려는데 시설이 없어 향교에서 교육을 하자고 하자 모든 향교가 들고일어나 시위를 하고 금지했다. 

이유는 향교에서 수학 과학등의 신교육을 하면 공자님의 혼령이 어지러워하신다는 이유였다. 

한때의 교과서에는 이걸 일제의 문화침탈이라고 썼다.ㅋㅋㅋㅋ



위안부 끌려갈때 조선의 남자들은 일본군 장교에 장군에 영친왕은 일본제1항공군 사령관을 지내고 있었다. 



이런 예로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연합국들에 의해 조선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참여를 거절당했다. '독립운동을 한 지배받던 세력이 아닌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A급전범 사형수까지 배출한 부역국이라는점이 예이다. '



김구를 죽인 안두희는 군인출신으로서 당시 김구가 살해당한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이 통일만 할수있다면 공산주의어도 좋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자'였고 몰래 김일성을 만나서 꼬봉짓하고 돌아다닌것이 가장 컸다. 



김구는 일제시대에 국밥 일본사람 먼저줬다고 일본 노동자 쓰치다 조스케를 기분나쁘다고 살해 유기한뒤 나중에 다시 유기장소로와서 시체에서 돈까지 훔치다 걸렸다. 치하포 사건



한국 현대정부에서 친일 청산을 실패한 이유중 하나는 일본제국시절 일본제국군 조선인 특별 지원병제에 1938년 부터 1943년까지 무려 73만명이나 지원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당시에 한국군 장군들은 일본군 출신이라 더운여름날만 되면 훈도시만 입고 돌아다녀서 미군들을 벙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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