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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Great Saints of the World

世界 四大 聖人


1. 개요[편집]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세계에 기반을 세운 4명의 성자와 현자(선각자)들을 일컫는 말. 이견이 많지만 대개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예수를 많이 꼽는다. 하지만 출처불명에 공신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굳이 특정 숫자에 집착하는 것도 의문.

생몰년대는 다음과 같다.

공자

BC 551 ~ BC 479

석가모니

BC 463 ~ BC 383과 BC 563 ~ BC 483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소크라테스

BC 469 ~ BC 399

예수

BC 4 ~ AD 33

2. 기원[편집]

4대 성인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 몇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의 이노우에 엔료(1858~1919)라는 불교사상가가 최초로 예수,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4대 성인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에 엔료가 뽑은 4대 성인에는 예수는 없고 대신 칸트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이후 와츠지 테츠로(1889~1960)라는 윤리사상가에 의해 칸트가 예수로 교체되어 현재의 4대 성인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쓴 책 《위대한 사상가들Die Groben Philosophen》에 소개된 4명의 사상가가 바로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라서 이 쪽이 기원이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서양쪽에서는 쓰지 않는 말로 소크라테스 대신 무함마드가 들어가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우리나라나 일본 등 동양권에서나 있는 논쟁이다. 당연히 아랍쪽에서도 모르는 내용이라 태클걸 일도 없다. 실제로 구글에서 네 사람의 이름을 영어로 검색해보면 야스퍼스의 책만 주구장창 검색된다.(...) 서양에서 성인(Saint)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가톨릭의 성인들을 말하는 거고...

3. 무의미한 논란[편집]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محمد)


이슬람의 무하마드(마호메트)가 들어가야 하느냐 소크라테스가 들어가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 많다. 일단 소크라테스가 들어가는 것이 정설로 여기지는 편이지만, 영향력으로 봤을 때 무함마드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크고, 무엇보다도 앞의 3명과 마찬가지로 한 종교의 창시자에 가깝기 때문에 자료에 따라서는 무함마드가 들어가기도 하는 편이다[1].

그의 풀 네임은 '아부 알-카심 무함마드 빈 압드 알라 빈 압드 알-무탈리브 빈 하심 빈 압드 마나프 알-쿠라이시'.

أَبُو القَاسِم مُحَمَّد بنِ عَبد الله بنِ عَبدِ المُطَّلِب

570년 4월 22일 ~ 632년 6월 8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좌)과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우)


그러나 아직까지는 소크라테스를 정설로 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비록 종교를 창시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기점으로 서양철학의 중심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그로써 2600년 서양철학사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있는 관념론의 사실상의 기원이 되었고(물론 가장 영향력이 컸던 철학자는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또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따라서 그 영향력에서 결코 크게 뒤쳐지지 않는 편이다. 즉 종교계에서의 석가모니와 예수의 위치를 철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차지하고 있는 셈. 참고로 공자가 죽은 10년 뒤에 소크라테스가 출생하였다.

무함마드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호전적인 성향이라서 넣을 수 없다는 서구중심적 혹은 이슬라모포비아적인 관점도 나오기는 한다. 그런데 뭐 기록을 보자면 다른 성인들도 나름 주먹떡에 일가견이 있는 양반들이었다. 석가모니는 술 취한 코끼리를 한손으로 집어 내던졌다거나[3]공자는 무인의 아들로 태어나 2m가 넘는 키에 전차를 다룰 줄 아는 인재였다거나, 소크라테스는 3차례나 전쟁에 참여하고 그중 한번은 패주하는 전쟁에서 동료들을 모아 전열을 재정비해 희생자를 줄인 전적이 있다거나, 예수는 환전상과 그들을 보호하는 어깨들이 즐비한 가운데 채찍 하나 꼬나 쥐고 무쌍난무를 펼쳐 다 뒤집어엎었다거나.

다만 예수는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로 하느님으로 여겨지고, 석가모니 역시 인간이지만 동시에 열반에 든 부처님으로 여겨지며, 무함마드는 성인이라기보다는 마지막 선지자.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성인은 공자 정도[4]. 소크라테스는 물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 철학의 시조라는 측면은 있지만 자기 스스로 남긴 가르침은 많지 않아서.. 


무(無)로의 회귀를 주장한 도교의 창시자 노자(老子) 아나키스트


도가 사상가인 노자가 거론되기도 한다. 노자 : 도가 하면 성인인데 무시하냐? 성인이라는 말을 내가 쓴거야. 공자는 군자 같은 말을 썼으니 4대 군자나 시켜라 유불도 중 도가만 빼다니 힝 힌두교 성인은 안넣어주나요? 조로아스터교도 좀 어떻게.... 또한 무신론적인 서양철학 애호가들은 인류사에 미친 영향력으로 볼 때 종교계 사람은 다 빼고 위대한 철학자만 넣어도 4명으로 모자란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요한건 상술했듯이 이 모든 논의가 사실 다른 나라에선 별로 언급도 안되는 공신력 없는 공허한 논쟁이다.(...) 걍 5대 성인이라 치고 무함마드도 넣던가 세계 4대 문명과 마찬가지로 작위적인 서열놀이에 가까우니 이 자체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


도가와 도교는 엄밀히 따지면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도가는 노자 같은 사상가에 의해 나타난 철학사상의 하나지만, 도교는 장각장릉 같은 교주에 의해 확립된 종교들을 출발점으로 본다. 도교가 종교로서 발전하면서 도가사상 등을 끌어들였지만 사상적 지향점은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닐 수 있다. 우선 도가=철학, 도교=종교로 보는 관점부터가 문제가 있다. 과연 철학과 종교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인가? 그것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당장의 불교만 보더라도 불교 교리를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불교 의례를 종교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 역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종교의 이분법에 따라 사고하는 결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도교가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도 있다.)

도를 아십니까? 의 그 도가 맞다.


공자가 주나라 낙양에 머물 당시 동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노자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노자는 공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했다.(사기 열전 노자편)

당신이 말하는 성현들은 이미 육신과 뼈가 썩어 없어지고,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오. 군자는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가지만 때를 못 만나면 이리저리 유랑하는 신세가 되고 마오. 약삭빠른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 두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높은 덕을 가지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고 들었소. 당신은 교만과 탐욕, 허세와 야심을 버려야 하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외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 줄 말은 다했소.


이후 공자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노자를 극찬했다.

나는 새가 날고 물고기가 헤엄 치고 들짐승이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달리는 들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질로 잡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어떻게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 만나 본 노자는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당시 공자의 사상을 비판하는 이들은 땅은 마차로 가고 강은 배로 건너야 하는데 마차로 강을 건너려 한다고 시대 착오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정작 공자라는 일개인의 평가는 굉장히 높았다. 공자 본인이 흠모했던 안영은 공자가 등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했지만 "공자야말로 당대 제일의 군자"라고 평가하였고, 공자가 노나라로 다시 돌아와 국부 대접을 받은 것은 노나라 군주가 죽으면서 공자를 등용하지 않는 걸 한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등용해달라며 주유열국하는 그 모습을 썩 좋게 보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혹자는 공자를 상갓집 개로 비유하여 공자 본인도 그 말이 맞다 고개를 끄덕였고,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니 정말 성인이라는 반 비아냥 섞인 말에도 그 자신은 비천하게 태어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변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당대 열국은 일관적으로 공자를 등용하지 않았고, 공자를 대단한 위인으로 평가하는 무리와 벼슬자리를 구걸하러 다니는 이라고 평가하는 무리로 나뉘었으나 명성만큼은 천하에 퍼져 공자 생전에 3천의 제자를 거느렸으며, 공자 사후에도 학단이 유지되었다.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יֵשׁוּעַ

1. 개요[편집]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로서[3]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느 역사 전문가나 지식가나 종교인이든 아니든 거의 이견이 없다. 

단순히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탄생 이후 2000년이 넘은 지금 전 세계 인구의 약 1/3인 24억명 정도의 인구가 기독교 신자다. 또한 종교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었던 로마 제국이 대략 A.D 300년 이후부터 보편 교회를 국교로 지정한 이래로 유럽은 기독교 국가로써 정체를 가졌기 때문에 문화, 언어, 미술, 음악, 문학 심지어는 정치 등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유럽의 기독교 문명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지구 곳곳을 정복하여 전세계 문명을 서양화 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을 퍼트렸다. 와닿지 않는다면 지금 날짜부터 확인해보자. 더군다나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와 철천지 원수로 생각되는 이슬람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넘사벽급의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도 볼수있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예수를 보는 시선은 종교마다 입장차가 있다. 쉽게 요약하면 이렇다.

  • 기독교에 의하면 온 인류의 구세주이자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페르소나)이되 본질(essence) 및 본성(nature)은 같은 자로, 그의 실체(substance)는 하느님이다.[4]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론[5]


또한 비종교적, 사회문화적 관점에서는 자신의 민족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평등과 박애를 전파한 위대한 사회운동가.

성경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동정녀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12]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목수를 양부로[13] 둔 인물. 기독교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책의 진주인공이며 책의 전반부 자체가 이 사람의 등장에 대한 복선이다.[14] 신자들에게는 인류 최고의 영웅대인배로 여겨진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꽤 나오며[15] 4대 성인 중 1명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지도 면에서는 그들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16][17]

나자렛 출신이라는 의미로 나자렛 예수라고도 불린다.[18][19] 단,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므로 나자렛 출생은 아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나자렛 출신이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헤로데의 마수를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해 있다가 그가 죽은 뒤 돌아와 정착한 곳이 나자렛이다. 다만 성모 마리아가 임신한 곳 역시 나자렛에 있을 때 일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본래 예슈아(יֵשׁוּעַ) 또는 예호슈아(יְהוֹשֻׁעַ)라는 흔한 유대인 이름이었는데,[20]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에수스(Ἰησοῦς)라는 그리스스러운 이름으로 변형되었다. 그리스 문자에는 숫자가 할당되어 있는데[21], Ἰησοῦς는 각각 10, 8, 200, 70, 400, 200을 상징해 합치면 888이 된다.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구원해 주신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메시아(מָשִׁיחַ, mashíakh)라는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번역이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고대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기름 부음의 의식은 크게 3가지 경우로, 특정인을 지명하는 경우에 해당이 된다. 왕, 대제사장 - 하느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의 주관자, 그리고 선지자 - 혹은 선견자, 예언자 - 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예수는 이 3가지의 역할 각각에 대한 정체성을 동시에 띄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예수는 신약성경 내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왕, 대제사장, 예언자라는 이스라엘 민족 내부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통합적이고 최종적으로 부여받은 유일한 존재로 통용된다. 예를 들어 왕의 역할을 보면, 이는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대관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22]. 이 전통은 사울에게서 시작하여 다윗 때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다윗처럼 이민족을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지도자를 의미했다.

그 밖에 '임마누엘'(עִמָּנוּאֵל)이라고도 지칭되었다. 뜻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처녀에게서 탄생한다는 것을 예언하는 말을 구약 이사야 7장 14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당대 유다 왕국 왕인 아하즈(BCE 736~716 재위)에게 메시아 강림을 전한 것이다. 성경 해석 과정의 예언 성취에는 부분 성취와 반복 성취가 있는데, 이는 아하즈 왕 시대에 실제로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태어나 예표가 되었고, 예수의 탄생으로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십자가형을 받아 죽을 때의 예수의 죄명은 바로 로마 제국에 반역하는 민족 지도자라는 의미인 '유다인의 왕'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있었고, 사형을 내릴 수 있는 기관도 총독부여서, 사형 제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형에 처해질 만큼의 죄는 무자비한 살인이나, 쿠데타 정도가 되지 않고서는 사형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는 당연히 살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쿠데타를 한 정치범으로 몰아서 처형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명패를 십자가 머리에 붙이고 형을 받았다. 때문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 성물로 취급하는 예수의 십자고상 등에는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의 왕)'의 머릿글자인 INRI를 흔히 볼 수있다.

세속적 의미에서 세상을 평정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메시아를 기대하는 유대인들 사이에선 이단 중의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과거의 경우 유대인들에게서의 예수는 그저 사기꾼 정도로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개혁에 실패한 젊은 사상가 혹은 랍비로 보는 경향이 생겼고, 심지어 예수를 본받는 랍비도 등장할 정도이다. 실제로 예수를 유대교에 도전한 혁명가로 볼 수 있지만, 살인, 간음, 이혼, 맹세, '귀에는 귀, 눈에는 눈'을 가리키는 유대교의 모세율법에 대해서 예수가 새로운 해석과 명령을 제시하므로[23] 타나크(히브리 성서)의 율법을 철폐하지 않으면서도(율법의 연속성) 율법을 완성한다고 본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를 말한 것이 아니라 아람어(아랍어가 아니다)로 말했다. 그리스어로 씌여진 신약 안에도 아람어의 흔적이 꽤 많다. 신약뿐만 아니라 타나크(히브리 성서)에서도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로 씌여진 부분이 많으며, 탈무드도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쓰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아람문자가 아니라 히브리 문자로 써서 문법과 발음면에서 정통 아람어와 차이를 보인다.


아람어로 쓰인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기독교(Christian)[성당(Cathedral) 천주교(Catholic)와 교회(Church) 개신교(Protestantism)를 막론하고]에서 종파와 교파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도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친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는 'Lord's Prayer'라고 한다. 개신교에서는 주기도문, 정교회에서는 주의 기도, 가톨릭에서는 주님의 기도라고 한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하는 기도와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한 말을 반복하는 기도 등, 설교 중에 좋지 않은 기도의 예를 들고 나서 기도의 모범으로 직접 가르친 기도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오 복음서 6장 9-13절 (공동번역성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카 복음서 11장 2절에서 4절 (공동번역성서)

 
위의 두 복음서 구절 중 더 긴 쪽인 마태오 복음서 판을 기도문으로 암송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루카 복음서에 실린 짧은 판본이 원형과 더 가깝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마태오 복음서 판은 말하자면 확장판. 하지만 이 확장판이 이미 1세기에도 널리 퍼졌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원문도 그리스어이지만, 예수는 입말로 그리스어가 아니라 히브리어 계통인 아람어 방언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주기도문도 아람어로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히브리어 및 아람어 버전 주기도문도 존재한다.

많은 후대의 사본에는 끝에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라는 송영이 붙어 있다. 이 부분은 이른 시기의 사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원래 이는 기도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례 중에 기도를 마친 뒤 덧붙이는 '영광송'의 일종이었다. 후대의 필사사들이 필사하던 중에 자기네 전례에서 사용하던 영광송을 기도의 일부분인 양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 송영은 개신교에서는 주로 붙여서 암송하고 천주교에서는 주님의 기도로 인정하지 않는다.[1] 이하 송영 부분은 괄호 안에 넣는다.

주기도문을 거꾸로 외면 악마가 나타난다는 카더라가 있다. 

지금은 미사에서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만, 예전엔 사제 혼자서 주기도문을 독송했고 마지막 부분인 악에서 구하소서(sed libera nos a Malo)만 신자들이 바쳤다.

2. 생애[편집]

2.1. 탄생 배경[편집]

예수의 조상이나 가계는 역사적으로는 불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에 귀족이나 제사장 출신도 아닌 서민의 집안에서 가계를 기록하는 경우는 없었고 대체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가까운 조상 정도의 계보만 기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경 기록에서 기적이나 신비적인 사건을 제외하고 본다면, 로마 제국의 사실 상의 식민지인 이스라엘 왕국의, 북부 지역인인 갈릴리 지방의, 촌락 나자렛에서 목수 요셉과 성모 마리아 사이에서 나온 첫째 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 성경에서는 마태오 복음서 1장에서 기록된 예수의 계보에 따르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나온다.[24] 루카 복음서 마찬가지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계보를 서술했지만, 마태복음의 족보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족보의 차이는 신학계에서 자주 다뤄진 떡밥.

마태 복음과 루가 복음의 해당 서술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관념인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메시아 탄생 때에는 특별한 하느님의 표징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서술로 추측된다. 마태복음에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하며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데, 해당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동정녀가 아닌 '(결혼을 하지 않았을 정도로)젊은 여인'이다. 그런데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역 성경에서는 그것을 동정녀로 옮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의 특별한 표징' 중에는 처녀잉태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대 신학계에서는 족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두 복음서가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서술되었지만 서로를 참고하지 않고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또한 두 복음서 모두 호적 조사 때문에 다윗의 후손인 요셉은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으며, 예수는 그때 출산하여 나자렛에서 자랐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관념을 적용한 서술.

2.2. 탄생[편집]

흔히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생일로 알려져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실제 기독교에서의 입장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는 것이 정론. 12월 25일이란 날짜는 3세기경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인기있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이었다.[25] 로마력에서는 12월 25일이 동지였기 때문. 이 시절에는 동짓점 절입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달력에서 대충 며칠쯤에 오면 그 날이 무슨 날이라고 정하자는 식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 외에 예수가 3월 25일, 즉 춘분 무렵에 수태되었다는 신비적 이유로 9개월을 더하니 자동적으로 12월 25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꽤 정밀한 전례학 자료 고증을 통한 설도 새로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책들이 전례학과는 거리가 먼 데서 자료를 찾다 보니… 12월 25일이 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로마 제국 시대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포용하기 위한 계산이었다는 주장도 있다.[26][27]또한 출생 당시 양치기들이 양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루카 복음서 2장 8~20절에 나오는데, 당시의 양치기들은 겨울에 바깥일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의 말처럼 9월이라는 기록이 신빙성이 더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의 생일이라 간주하는 날에 상당수의 인류에게 빼먹지 않고 꼬박고박 매년 축하를 받는다는 점에서 축복받은 사람. 때문에 일부 소수 신자들 중에선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를 안지키고 진짜 탄생일로 추정되는 날을 계산해서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28] 요셉이 로마 제국의 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내려가는 도중 낳았다는 복음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정확한 출생년은 BCE 4년[29]. 그마저도 날짜에 대해서는 포기해야 한다. 이전 판본에서는 1월 4일이라고 했다. 이건 동방교회에서 역법상 차이로 동짓날이 달라진 것이다. 이것도 전례학적으로는 이미 예전에 알려진 일.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CE 1년은 물론 BCE 4년에도 호적조사는 없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최초로 로마식 호적조사를 한 것은 CE 6년이다. 일단 목동들이 밖에서 을 치다가 노숙할 정도였으면 겨울은 아니며, 오히려 초여름으로 추정된다. 로마 기록을 대입하면 좀 더 아스트랄해진다. 로마 제국의 경우는 인구조사관이 따로 있어서 각지의 인구를 조사한 통계를 남기는 경우인데, 기록에 의거하면 내전 등의 요인으로 해서 켄소르(Censor), 즉 조사관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기원전 8년과 기원후 14년으로 기록된다. 달리 말해서, 기원후 6년의 조사 역시 불분명하며, 적어도 경전 기록대로 하여 황제가 지시한 호구조사나 공식 조사는 아니거나 혹은 애초에 그조차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불문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마구간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말구유에 뉘였다는 서술이 있을 뿐. 사실 따지고보면 여관에 방이 없다는 이유로 마구간에서 출산한다는 것 자체가 뜬금없지 않은가? 당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 아니면 가축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사는 공간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30]"라는 구절을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아기가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말구유에 눕혔다."고 해석하는 것 자체는 매우 자연스럽기 때문에, 현대에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 사실 유럽도 중세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집은 가축 사는 곳과 사람 사는 곳이 나뉘지 않아서(...) 중세 유럽인들은 해당 성경 구절을 듣고서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유에서 포에 싸진 상태로 구유에 뉘어졌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하나님의 가호를 받은 존재라는 증표였다는 견해도 있다. 유대교에서는 포와 구유가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2.3. 공생애 이전의 삶[편집]

예수의 직업은 성경에서 목수의 아들 또는 목수[31]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를 들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가구 제작 장인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은 부적절한데,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텍톤(tekton)은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석재를 사용하는 것이든 건물을 짓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 한국어 성경에서는 목수로 번역되었고 영어 성경에서는 carpenter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옛날에는 나무로 집을 지었고, 한국도 영국도 옛날엔 가구를 만드는 목수와 집을 짓는 목수가 따로 구분이 엄격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번역이다. 예수가 살던 나자렛 근처는 나무가 적고, 그리스풍 신도시가 건설되던 시기였으므로 목재보단 석재를 써서 일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통해 석공이라고 번역하는게 맞지 않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어의 중의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아예 건설업자라고 옮기는게 제일 정확할 수도 있겠다. 다음과 같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언급이 간접적, 정황적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14장 58절)

  •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태오 복음서 7장 24-27절)

  •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르코 복음 12장 10-11절)


즉 건설에 관한 비유를 여럿 하고 있다. 그에 반해 목재나 석재를 써서 일하는 것을 연상시키는 비유는 찾기 힘들다. 결국 한국어 단어의 목수나 석공이라는 단어는 나무/돌을 이용해 건물뿐만 아니라 소도구나 가구를 만드는 사람도 포함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역이 미묘하게 엇나가게 된다.

기존 4대 복음서는 인간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기가 어렵다. 그나마 예수를 가장 인간적으로 조명한 복음서는 루카 복음서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32]

2.4. 공생애[편집]

이후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변혁을 일으켰다. 이 변혁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33]과 민중들을 억압하는 잘못된 유대교 율법주의 권위를 타파하는 것인데, 이는 형식적 율법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리는 당대 권력자들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예수는 이로 인해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된다. 

신학자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역사적 예수를 '갈릴래아의 견유'[34]라고 설명한다. 다만, 크로산은 자기 저서에서 각지의 여러 권위자들이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했지만 서로 모두 달랐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크로산의 이론도 결국 크로산의 개인 의견.

2.5. 죽음과 부활[편집]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예수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부활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 되었으나[35]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준 뒤 승천했다고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에 따르면, 예수는 이미 전부터 십자가에 매달릴 것을 예견했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 스스로 선 것이라 한다. 교리에 따르면 이것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그의 행보이며, 형벌 자체는 인간의 죄를 대신 받음을 의미하고, 부활은 죄를 사한 후의 인류구원을 의미한다. 물론 이 구원은 예수를 믿는 자에 대한 구원을 의미한다.

4복음서의 경우 일관되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고, 기독교인이 아닌 대다수의 학자들도 4가지 팩트[36]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특히 예수가 잡힌 즉시 순식간에 와해되었던 제자들과 신자들이 갑자기 열렬하게 그리스도가 부활했음을 외치며 순교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어떤 영적인 경험(부활이든 아니든 간에)을 했고 그 경험으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짧은 결말이 제일 역사적 사실과 가까운 증언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빈 무덤에 관해선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부정하며[37] 부활이 육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의미의 부활이라고 본다.

어느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수의 정확한 사망 날짜는 A.D.33년 4월 3일 금요일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예수가 죽자 땅이 흔들렸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지각 활동을 조사해 지진이 일어난 시기를 추정한 것. 다만 성경에서 땅이 흔들렸다는 기록이 비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약간 외적인 부분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 에서는 참혹한 모습이 성스러운 표식이 되는데에 대한 거부감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베르나르 뿐만 아니라 예수에 호감은 있지만 기독교에는 비판적인 사람들, 혹은 반기독교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떡밥. 하지만 십자가는 사도 시대에도 사랑과 희생을 상징했다.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기도 전의 유물들에서도 십자가를 자주 발견할 수 있고, 바울의 서간들에서도 예수의 희생과 부활을 십자가의 승리라고 표현하는 등 극초기 기독교에서부터도 십자가를 긍정적인 상징으로 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야 그럴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부활했음을 믿는데 십자가 보고 슬퍼할 이유가 없다그 뒤로도 2세기 무렵에 성호를 긋는 등 사용이 점점 확대되다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완전히 뿌리 내린다.





불교

부처 석가모니

佛陀 釋迦牟尼

Buddha Gautama

बुद्ध शाक्यमुनि

1. 개요[편집]

깨달은 자[6]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다. 부처의 어원은 붓다를 한자로 차음한 불타[佛陀]에서 왔으며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를 중국어(한자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카는 그가 속하던 부족,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카(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석존, 불, 여래 등의 10가지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또한 붓다(부처)로도 불린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7][8]로, 샤캬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라자'[9] 슈도다나와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사방의 성문 밖에서 노인과 병자와 망자 등을 만나 인간의 생애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생로병사)으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결국 왕위를 버리고 출가. 많은 수도 끝에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열반하였다.

석가모니는 인도인이라고 많이 알려져있는데 확실하게 인도사람이라고 단정 지을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가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10]


실제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고타마 싯다르타고행상


2. 일생[편집]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그런지 얽힌 전설 및 일화도 가지각색이다. 우선 어머니 마야 부인이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11] 마야 부인은 당시 인도 풍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룸비니 동산[12]에서 탐스러운 무우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다가 산기를 느끼고 그곳에서 산실을 차렸다.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로 나와[13], 육방, 혹은 팔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14] 하지만 마야 부인은 출산후 7일뒤 숨을 거두고 만다. 겨드랑이로 나왔으니...

그가 태어나고 난 후에 아버지인 정반왕이 예언자 아시타 성인에게 예언을 들었는데, 만약 궁정에서 그대로 자란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고타마를 돌봤으며 아버지는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바깥을 잘 안보여주고 궁정에서만 호화롭게 자라게 했지만, 알다시피 몰래 바깥을 경험한 싯다르타는 뭇 삶(중생)들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금수저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면 덧나냐

다른 일화로는 젊어서는 무예에 통달하여[15] 무술대회에서 사촌 데바닷타나 아난다 같은 강무자를 물리치고 우승했으며, 성난 코끼리를 잘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을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경지 또한 매우 원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의 기록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른 뒤, 다치거나 몸에 이상이 온 사례가 있는데, 데바닷타[16]가 갑자기 돌을 벼랑 위에서 굴려 석가모니를 죽이려 했을 때 이를 피하다 튄 돌에 발가락을 맞았을 때와[17] 열반 직전에 대장장이 순타가 공양을 드리고 식중독 증세를 보인 정도.[18]

최후에 열반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여덟  너 이 나와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의 왕들이 한 바라문의 조정에 따라 나눠 가졌다고 한다.[19] 뒤늦게 온 한 나라는 남은 재를 가져갔고, 조정을 맡은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2.1. 석가모니불의 오도송(悟道誦)[편집]

많은 생을 윤회[20]하면서 나는 치달려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버렸다.

anekajaatisam*saaram* sandhaavissam* anibbisam*/
gahakaaram* gavesanto, dukkhaa jaati punappunam*//
gahakaaraka dit*t*hosi, puna geham* na kaahasi/
sabbaa te phaasukaa bhaggaa, gahakuut*am* visan#khatam*/
visan#khaaragatam* cittam*, tan*haanam* khayamajjhagaa//”

-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 팔리어에서 직접 번역 -

2차출처에서 재인용


위 내용은 담마빠다(법구경)의 153번과 154번의 게송이다. 영문 번역본

3. 사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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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중심 사상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21]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22][23]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되면 그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 경 중에서[24]


역사학적으로 따자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식자에 가깝다.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해서 5단계로 계급을 나누고, 전생에 업(카르마)를 져서 현세에 이런 걸로 태어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장한다. 그러니 내가 현생에 그 계급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는 지금 계급이 아닌 더 높은 계급으로 환생한다든지 바라문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의 지배층은 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해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현대에도 이러한 문화는 인도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25]

그런데,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일부 권력자들의 열성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 이후의 인도에서는 타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힌두교가 세를 급격히 불려 민중들을 적극 공략해 인도의 사상의 대세를 점하게 된다.





유교 동양철학

공자

孔子

Confucius

1. 개요[편집]

(仁)이 멀리 있는 줄로 아느냐? 내가 바란다면야, 인이 여기에 오느니라!


논어 술이편에서 : 子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


유교의 창시

현대중국어 발음은 쿵쯔(Kong zi). 이름은 구(丘)이며, 현대중국발음은 추(qiu). 는 중니(仲尼)다. 중(仲)은 둘째라는 뜻이고, 니(尼)는 공자가 태어난 니구산의 니다. 이름 구도 니구산의 구.[6] 공자라는 존칭에서 자(子)는 선생이라는 뜻.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孔門祠堂)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다. 大成이라 함은 맹자가 『孟子』에서 공자를 평한 말인 '공자께서는 여러 성현들의 도를 살피시어 학문을 집대성[7]하셨다'에서 따왔다. 至라 함은 '지고하다(至高)'의 의미. 聖이라 함은 '~하신 성인(聖人)'의 의미로, '지'와 '성'이 결합하여 공자의 전용 칭호인 至聖(지성)이 만들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경지에 이르신 성인'이라는 것. 文宣(문선)이라 함은 '중원(中原)에 문화를 베풀어 주셨다!'라는 뜻. 이라 함은…

부자(夫子)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건 별 거 아니고 원래 그(夫) 선생님(子)이라는 뜻이다. 공부자(孔夫子)라고 표현하는 사례는 별로 없는데, 서양선교사들은 이 표현을 라틴어스타일로 바꿔서 콘푸키우스(Confucius)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공부자"는 중국어 발음으로 "Kong Fu Zi" (쿵푸쯔). 맹자도 이런 스타일로 멘키우스(Mencius). 단, 맹자는 부(夫)가 안 들어간다.

그러니까… 서구권에서 공자와 맹자의 이름은 공부자우스, 맹자우스 요런 식이라는 것. 이 두 사람이 라틴어식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는 두 명뿐인 중국인이다. 묵자(墨子)를 'Micius'로 칭하기도 하나 널리 쓰이진 않는다.

위 '부자'와도 통하는 것으로,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 '철학자'라고만 써놓으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던 것 처럼, 한자문화권에서는 다른 수식어 모조리 생략하고 '선생님(子)'이라고만 적어넣으면 공자를 뜻했다. 즉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공자 왈'도 아니고 '자왈(子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로는)'이라고만 해도 공자의 말을 자동으로 뜻했으며, 이러한 점에서[8] 한자 문화권에서 그의 위상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조상[편집]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게 중요한 것이 송나라는 과거 은나라의 유민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마치 유대인인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아인슈타인이 자기 민족의 종교적 성향과 정반대되는 학문을 발전시킨 것처럼, 종교 문명인 은나라 출신 공자가 주나라의 인문문화를 발전시킨 것. 3년상도 은나라의 풍습으로, 공자가 죽음을 앞두고 말한 문구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장사지내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계단에 지내고, 은나라 사람은 양 기둥사이에 지낸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일찍이 은나라 사람이었다."[9]

여기서 공구의 이름에 대한 논란도 추가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춘추시대의 성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10]. 춘추시대에 성과 씨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성은 조상대대로 이어진 근원에 가까운 개념이어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교체할 수 없었지만, 씨는 집안을 구별하는 개념이어서 필요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공자의 초기 제자중에서 남궁경숙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아버지는 맹이자이고 형은 맹의자였다. 즉 이 사람의 성은 원래 맹이었다. 하지만 차남인 맹경숙은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남궁이라는 씨를 만들어서 분가한 것이고, 이후 사서에도 남궁경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해하기 쉽게 한국식으로 설명하자면 시조 외에 중시조가 있어서 성을 바꿔버리면 이후의 후손들은 중시조를 따라서 성을 사용하게 된다고 보면 그나마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11]
사실 성과 씨가 구분되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풍습. 프라이노멘(名) + 노멘(本, 姓) + 코그노멘(派, 氏)이 기본.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율리우스 본관의 카이사르 파의 가이우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나마 비슷한 것으로 한국에는 '본관'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를 보자. 공자는 일찍이 상나라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상나라에서 성을 가진 이들의 성은 '자子'다[12]. 때문에 공자의 성 역시 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송나라 거주 시기에 공자의 조상중에서 '공보가孔父嘉'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공보는 (字)고, 가嘉가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건 숙량흘 각주에서 다시 설명하고, 즉 이 사람의 본명은 자가子嘉이다. 문제는 이 공보가가 송나라에서 대사마까지 오르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공보가가 결국 정적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후 '공자가어'는 공자의 계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보가 → 자목금보 → 역이 → 방숙[13] → 백하 → 숙량흘 → 공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가의 자였던 공보의 첫번째 글장이 공이 성씨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14]. 그러다가 숙량흘 대에 이르러서 '사'에 해당하는 작은 무관직을 한 것이다.

2.2. 출생배경[편집]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15]은 장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었다고 한다. 노나라군이 유인계략에 속아 상대편 성 안에 갇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16]을 그냥 팔로 받쳐서 아군을 달아나게 했을 정도로 힘이 좋았다고 한다. 뒤에 태어날 공자 역시 아버지 숙량흘을 닮았는지 그 또한 체구가 좋았다.[17] 자로가 아직 공자의 제자이기 이전, 그저 글귀나 읽는 비리비리한 서생인 줄 알고 쳐들어갔다가 이 장대한 기골에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숙량흘은 딸만 9명을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서 겨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몸에 장애가 있었다. 이름이 맹피(孟皮)였는데, 맹은 서장남의 뜻을 지닌다. 절름발이로 추정된다. 논어에 형의 딸을 공자가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실존성이 입증된다.

결국 숙량흘은 60대에 무당의 16살 짜리 무녀(巫女) 안징재를 부인으로 들인다. 안씨 집안에서는 3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18], 숙량흘이 셋 중 하나를 아내로 맞으려 하자, 막내딸 안징재가 스스로 나서서 숙량흘의 아내가 되었다. 결국 공자를 낳았으니 안징재는 영험한 무녀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숙량흘은 로리콘이 되어버리는 운명…

숙량흘과 안징재는 노나라 수도 곡부 인근의 니구산(尼丘山)에서 살았다. 안징재만 거기서 살고 숙량흘은 가끔 찾아오는 형식. 얼마 후 안징재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니구산에 있는 부자동(夫子洞)이란 작은 동굴 안에서 공자를 낳았다.[19]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탄생을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올 김용옥은 이를 말 그대로 '들에서 했다'라고 설명한다. 즉,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관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공자는 거의 사생아나 다름 없었다. 공자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을 품은 사마천이 이 정도로 표현한 걸 보면 딱히 미화시킬 방법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라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사마천은 굉장히 함축적인 의미로 글을 썼다. 숙량흘이 안징재와 혼을 올릴 당시 그의 나이는 66세었는데, 당시 남자가 여자를 맞이할 수 있는 최대 나이가 64세였다. 66세에 여자를 들인 숙량흘을 '조야하다', 즉 '천하고 보기 좋지 못하다'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야'라고 사마천은 일컬었고 좋지 못한 만남에서 나왔다라는 뜻의 야합이생일(野合而生)이라고 보는게 맞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이상 숙량흘이 공자의 아버지라는 것이 사기(史記)로 인해 흔히 알려져 있는 내용이지만, 이것을 온전히 부정하는 학설 또한 존재한다. H.G Creel에 따르면 그의 족보가 좌전(춘추좌씨전)에 상세하게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그 이전 문헌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문제를 그토록 상세하게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럽고, 초기 문헌(공자로부터 약 100년간의 문헌)에 공자의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은 것 또한 족보에 의심을 품게 한다고 말한다. 크릴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사기(史記)는 모두 공자의 아버지를 숙량흘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좌전(左傳)에 언급된 숙흘(叔紇)과 동일인물임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조그마한 핑계만 있어도 공자 이름을 끌어대는 것이 보통인 좌전이 숙량흘이 공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두 번 다 말하지 않은 것은 매우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후세에 그것을 동일인으로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데 있는 것 같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공자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추인(陬人)이라는 것 뿐이며[20] 좌전에 언급된 추인은 숙흘 뿐이다. 공자에 관한 자료라면 어떤 단편이라도 고문헌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하였음에 틀림없다.”[21] 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공자의 경우 성장기 집안환경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으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세간의 오해와 달리 오히려 공자의 가문은 노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이며 재산 또한 엄청난 재력을 가진 집안이라는 의견도 있다. # 상기의 블로그에 따르면 당시 공부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며 공자가 후세에 유명하게 된 이유는 집안의 재산을 기존과 같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숫자의 후학양성규모의 경제에 기울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22]

2.3. 유랑생활[편집]

춘추시대 말기는 유세객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닌 게 유독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를 전부 공자의 유랑생활이라고 열거해 놨지만, 공자의 유랑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뉜다.

  • 공자는 원래 밑바닥 출신이기 때문에 30대 때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여러모로 공자를 포장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적당히 필터링하면서 봐야 된다. 30~40대 때의 유랑은 거의 유학에 가까운 유랑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천하라는 개념은 중국의 영토와 함께 확대된 개념이라서 요즘 중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통이 불편한 고대에는 중국의 2-3개의 성 수준도 천하였다.

  • 보통 공자의 유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젊을 때 돌아다니는 것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 60대 이후 노나라를 떠나 14년 정도 유랑한 것을 가리킨다. 이 유랑은 구체적으로 정치참여를 하려고 유랑한 거라 대통령이 순방하듯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14년 동안 노나라를 떠나 있었다는 건, 당연히 14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는 걸 의미한다.


공자가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노나라로 돌아온 건 각 나라의 군주들이 공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자가 못나서가 아니라 군주들이 공자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거나 그의 생각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당연히 공자는 혼자 다닌 것이 아니다. 일단 한 나라에서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혼자 짐싸들고 다니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요즘도 해외여행 다니다가 사고가 나는데 옛날에는 오죽할까. 웬만한 규모로 여행을 다닐려면 용병을 고용하거나 집단 자체가 전투력이 있어야 했다. 공자의 집단은 그냥 책이나 읽는 학자집단이 아니라 당장 전쟁을 수행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인물들을 포함한 집단이었다. 남궁경숙과 다녔다는 기록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설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상당히 문학적으로 포장이 많이 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역사계의 상식이다.

  • 공자가 거물이 되어 유랑을 시작한 건 60대 이후이기 때문에 31세 연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자공이 유랑생활의 물주였다고 볼 수 있다. 논어에도 공자가 자공이 엄청나게 돈을 잘 번다고 감탄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공은 원래 출신 자체가 상인이었다. 공자가 젊었을 때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하는 계손씨와 남궁경숙(맹손씨)은 노나라의 대부였는데, 대부라는 건 쉽게 말해서 노나라의 한 지방을 지배하는 군주이다. 공자가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공자가 대단한 인물이라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그 집단 밑에서 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노나라가 싫어서 남의 나라에서 일하겠다는 사람한테 노나라 대부들이 왜 돈까지 줘 가면서 유랑생활을 지원하겠는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계손씨 맹손씨 등의 실권자들과 충돌 때문이었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공자가 그동안 벌어 놓은 돈과 자공이 투입해 준 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2.4. 정치인생[편집]

그가 다스린 지역은 몇 년 안에 질서가 바로잡히고 착실하게 내실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을 때는 초나라 주변국가들이 합동으로 병력을 파견해 공자를 포위해 죽이려고 했을 정도.

절약형 경제정책을 펴며 노나라를 다스렸는데, 이웃 대국인 제나라가 공자를 견제하기 위해 노나라가 소비형 경제정책을 채택하게 만들었고,[25] 노나라 내에서 공자를 두려워했던 기득권 층의 공격도 있고 해서, 결국 실각하고 노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후 천하를 주유하며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실패하고, 말년에 국부(國父) 대접을 받으며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노나라 정공 10년(기원전 500년)의 일인데, 춘추 경문에서 "여름, 공이 제후(제나라 왕 - 작위가 후작이라 저렇게 부른다)와 협곡에서 만났다. 공이 협곡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과 환과 귀음 땅을 돌려줬다."라고만 서술한 사건이다. 춘추 3전(곡량전, 공양전, 좌전)에서는 이 만남에서 공자가 보여준 활약을 각각 서술했는데, 좌전에 나오는 얘기가 가장 자세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협박당할 위기에 처했고, 제나라는 "중니(공자)는 예를 좋아하지만 용맹하지 못하니 담판 때 주변에서 무기를 들고 춤추게 해서 겁을 주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공자는 회담 전부터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많은 군사를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했고 무기를 든 이민족 춤꾼들이 노나라왕을 위협하자 "두 나라의 임금이 만나는 곳인데 이런 자들은 있어선 안됩니다."라고 꾸짖어 물리쳤고 제나라왕이 요상한 차림의 미녀와 광대들을 들여보내자 "양국의 군주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며 분위기를 어지럽힌 것들은 마땅히 다 죽여야겠죠?"라고 외쳐서 광대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제나라는 노나라를 협박하긴커녕 노나라에게 기가 죽어버렸다.

다만 공자의 정치적 인생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마음에 이상을 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쓰임받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그것을 실현할 자리를 구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것이다. 노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 노나라의 실세는 계씨였다. 그리고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믿을 만한 기록은 공자의 어록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조작의 혐의가 매우 짙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을 때 계씨 밑에서 일하였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 노나라에 돌아온 계기는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계씨 밑에서 일하면서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후이다. 이때 공자의 제자들은 어느 정도 노나라에서 지위를 굳혔고, 그 존경하는 스승이 끈 떨어진 연처럼 지내는 것은 결코 그들의 체면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중국 역사의 성인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공자가 인생에서 성공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벼슬도 제대로 못했고, 안회, 자로와 같은 아끼는 제자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야 했고,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여 '仁'에 입각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상은 천하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 시스템적으로는 분명 한 단계 발전한 시기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군주와 신하들 간의 배신이 난무하고, 남녀 간의 근친상간 및 타락이 절정에 이르렀고, 지배층이 백성들을 철저히 쥐어짜는 말세였다. 하지만 도리어 공자가 말하는 '인간다움'을 가슴에 새긴 제자들이 온갖 배신으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그 자신이 그 배신으로 말미암아 자리를 차지한 각 국의 군주들에게 쓰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로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공자 무리의 취업률을 높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죽음 이후, 공자의 제자들이 노나라에서 대거 등용되기 시작했다. 자공과 염구는 각기 외교와 군사에서 계씨 밑에서 명성을 떨친다. 그리고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충심을 다하는 인간적인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수없이 되뇌이면서, 유교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26]

반면 공자에 관한 관직 기록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입장도 있는데, 본문에 자주 추가된 중국 학자 리카이저우의 글이다. 사실 논어를 포함한 글들을 제자들이 이후에 추가했다고 한다면, 공자의 말이건 행적이건 진실공방부터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도 공자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완벽한 정치적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우선 리카이저우의 글에서 계손씨를 포함한 계씨는 공자의 후원자이지 경쟁자가 아니고, 공자 역시 재상에 오른 적은 없다. 하지만 40대에서 50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공자는 중도재, 사공, 대사구의 직책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녹봉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노나라이건 위나라이건 제나라이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고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시 55세 이후에 다시 유랑을 떠났다가 60대에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관직에서 활동하지 못했지만, 이걸 인생에 있어서 좌절로 보긴 어렵다. 공자는 관직 생활 과정이나 명성으로 인하여 재산도 꽤나 모았고, 3천명에 가까운 제자를 받아들이면서 수업료도 받았다. 집도 당대의 대신들만큼 잘 살은 것은 아니지만, 100묘[27]라는 집의 크기는 소도시의 일반인들이 5묘의 집에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20배나 되는 크기다.

2.5. 말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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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공림(孔林)에 있는 공자의 무덤. 
묘비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

10년 넘게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고국으로 돌아온 공자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애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피살당한 다음해에 공자는 병석에 누웠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온 자공에게 공자가 왜 이리 늦었느냐고 탄식한 후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은 죽어가는가![28]

자공과 만난 후 일주일이 지난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기원전 479년 3월 9일), 공자는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국지에 나오는 공자

3. 사상[편집]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은 한마디로 호학(好學)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것. 물론 이 배움은 수능공부나 고시패스를 위한 공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10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도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이 나만큼은 되는 사람들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나보다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부하며 말하기까지 했다.[29]

또한 부자가 되든 거지가 되든 정당하게 살아야지, 부자가 되려고 더러운 짓을 하거나 거지라고 해서 더럽게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적 가르침 중 하나다. 논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공자의 가르침은 현란한 언어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말만 간단하게 해주는 스타일.

인(仁)이라는 개념도 논리적으로 정의해 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후대의 해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을 좋아하고 안 좋은 것을 싫어할 줄 아는 마음, 궁극적으로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많은 교류와 접촉을 하기 전부터 상대를 먼저 인식하려 노력하고 적극 배려하는 마음을 의미한다.[30] 요즘 말로 하면 비언어적 소통 혹은 다중적 소통, 즉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에 가깝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간단하게 심미적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그럴듯한 말재주를 늘어놓거나 좋은 표정을 꾸미면서 남에게 가식 떠는 - 교언영색하는 인간은 불인(不仁)하다고 말한다.

원래 공자는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공자에게 충(忠)이란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진심과도 같은 의미로 쓰였고, 효(孝)란 부모자식 간의 사랑으로써 말하여졌다. 하지만 바로 직계 제자들부터 충효를 절대적 복종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증자.[31]

3.1. 교육[편집]

흔히 유교라고 하면 도식적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기 쉽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공자 본인은 그렇게 틀에 박힌 스타일로 교육하지 않았다. 공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라는 표현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독서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 시경은 가사만 전해져서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 예는 그냥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 이걸 마스터하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의 국가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써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한편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 즉, 전쟁기술이다.

  • 서와 수는 문서 만들기와 회계처리라고 보면 된다.[32]


유교가 대충 뜬구름 잡는 철학공부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공자는 정말 당장 관료로서 써먹을 수 있는 실용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랄 것이 중국에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논어의 자로편을 보면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된다고 얘기한다. 공자에게 있어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렇듯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좋아함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33] 다만 공자 숭배가 심해지면서 "공자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유학자들이 많아졌고 최술은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이를 강렬히 비판했다.

3.2. 가무[편집]

공자는 무녀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에 익숙했는데, 당시에는 무녀가 곧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각종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으며, 노래부르기를 심히 즐겨하여 노래 잘 부르는 사람만 만나면 노래를 먼저 부르게 하고 따라 부르곤 하는 전문적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술이편 3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이러한 무속의 전통 속에서 크면서 일찍이 이 "노래"라는 인간의 문화현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노래를 단순히 듣고 즐기는 수준에서 앞으로 올 수천년의 인류의 문명의 보편적 교양의 전범으로서 승화시켰다. 공자는 제자들에게도 노래(詩)를 암송하게 하는 교육을 했다고 한다. 

3.2.1. 금(琴) 수업의 일화[편집]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가 악관(사양자-師襄子)에게 금 타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가 한 가지 곡을 익히는데 악관이 다른 곡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고 말하자 공자가 "나는 이미 그 곡은 익혔으나 아직 그 기술은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 연습하였다. 기술을 터득하고도 '곡조의 뜻'을 터득해야 한다며 계속 연습하였다. 뜻을 터득하고도 '그 곡 속의 사람됨'을 터득하지 못하였다며 계속 연습하였다. 결국 그 곡 속의 사람됨을 터득하였는데….

이제야 나는 그 곡 속의 사람됨을 알았으니 검디검은 피부에, 큰 키에, 눈은 큰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고 사방 제후국에 왕 노릇 하는 것 같으니, 문왕(文王)이 아니면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으리오!

라고 말하며 문왕의 곡이라는걸 알아냈다. 악관이 일어나 두 번 절하며 "원래 나의 스승께서도 이 곡이 문왕조(操)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4][35]

3.3. 인성론[편집]

맹자가 성선을 주장하고, 순자가 성악을 주장한데 비해, 공자 본인은 간단하게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는 비슷하지만 후천적 학습에 의해 차이가 난다 정도로만 말했다. 유교는 원래 본성 같은 것보다는 교육을 중시한다. 맹자와 순자 역시 교육을 해야 하는 근거로 저것들을 제시했던 것이다.성선이라 가르쳐야 돼 vs 성악이라 가르쳐야 돼 유교의 학자들이 만든 모든 이론은 사실 근본적으로 공자의 핵심 사상인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상[36]의 근거를 위해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7]

하지만 2400년후에 어떤 작가의 을 위해 성선설을 주장한 것으로 나오는데다가 콩자로 개명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3.4. 무(武)[편집]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당시 도량형으로 약 170 가까이 됨)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전차 몰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38]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39]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 플라톤도 거구에 레슬링은 잘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공자처럼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소크라테스는 참전용사다. 크샤트리아 싯다르타에 채찍 마스터 예수, 메카 정복자 무함마드까지 성인은 모두 전투민족이다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 밖에 없게 된 것.

3.5. 공자 관련 문헌[편집]

공자는 저술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후대에,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제국과 같은 거대한 권력체의 후원을 받아 경전화될 때 성립되기 마련이다. 논어도 공자의 책이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공자는 이론보다는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인생에 대한 각종 일화와 기록의 일차적 소스로 가장 유명하고 진실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것은 당연히 논어. 그렇지만 예기에서도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자와 관련된 일화를 상당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예: 가정맹어호) 그 외에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 시기까지 구전되거나 기록에 남아 있던 각종 일화들을 모아 놓은 공자가어도 중요한 소스.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한편의 완성된 전기로 만들어 놓은 현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당연히 위의 소스들을 이용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제외한 다른 자료들은 단편적이거나 위서이거나(예: 공총자) 실화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깝거나(예: 장자) 위의 자료들을 이용한 이차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철학

소크라테스

Socrates

Σωκράτης

1. 개요[편집]

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2]

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3]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4]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2. 개인적인 삶[편집]

외모는 대머리에다가 못생겼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5][6]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7]

그의 마누라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8]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선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허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자결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어서 홧김에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뿌리고 구박도 자주 했지만….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했다고도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9]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장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한 것.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10][11]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3. 삶과 철학[편집]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선비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돈 벌어오라는 다혈질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 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21세기 유부남들도 자주 하는 말이라는 데서 소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12]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 때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소크라테스의 금수저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회의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현재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잉여로운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13] 현재의 기준에서 보면 돈을 버는 소피스트들이 오히려 더 생산적으로 보일지도...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어느정도 배금주의를 전제한 것인만큼 별로 훌륭한 관점은 못된다.

기존 버전에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고 여기에 열심히 참여했을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유명인사였을 것이라고 적혀있었으나 이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아테네에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은 맞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 그다지 활발히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그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에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사사로이 그렇게 충고를 하면서 부질없는 참견을 하지만, 공적인 모임에 나타나서 나라에 대해서는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이미 여러분이 여러 번 여기저기서 내가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것, 즉 나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신의 알림이라든가, 신령스런 것인데...(중략)... 바로 그것이 내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반대하고 있거니와, 그 반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나하면 아테나이의 여러분, 내가 일찍이 어지러운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더라면 틀림없이 벌써 몸을 망치고, 여러분이나 나 자신에게나 아무 이로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명> 올재 번역본 중


이전에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무지를 드러내 원한을 산 것이 사형판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서술되어있기도 했으나 별로 가능성이 없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을 보면 당시의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 중 한 명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소피스트 중 한 명이라는 주장을 먼저 부정하고 소위 '무지의 지'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이 소피스트 중 한 명이라는 오해가 어찌하여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겠다면서 그 후에 나온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악평은 소피스트들의 무지를 드러내서 원한을 산 것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소크라테스의 활동 자체가 소피스트들과 같은 것으로 오해를 받아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14]이라고 부른다.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피질문자가, 질문자의 문답법에 의하여 결국 자신의 주장을 자기 입으로 자연스럽게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통해 논쟁의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자세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상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형사가 사용하는 유도심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을 지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 철학을 위해 기존에 있는 개념(가령 '경건함', '선함', '좋음' 따위의)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따라 하기는 쉽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심오한 말을 남겼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자[15]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질질 끄는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16]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17]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 참고로 흔히 알려진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18]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서양 고대철학 3대장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먼치킨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인류 역사상 손꼽힐만한 스승-제자 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플라톤 말고도 유명한 자들이 있다. 몇 차례 연급된 크세노폰 역시 그러하며,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그러하다. 또한 키레네 학파를 창시하게 되는 아리스티포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키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디오게네스의 스승인 안티스테네스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메가라 학파의 창시자인 에우클레이데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19]

4. 죽음[편집]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다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은 한 적이 있다. 후술된 내용 참조.[20][21]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위가 신들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아테네의 전통을 해친다고 생각되어, 당대 아테네 상류층에게 위험인물로 낙인찍혔고,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꽤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전쟁에서 이긴 스파르타의 힘을 업고 권력을 잡아 반대파는 (민주파 외 온건 과두파들까지) 죄다 죽여 버리고, 시민의 수는 3,000명으로 고정시키고선 나머지 인원들은 언제든지 즉결처분 시키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폭군 크리티아스[22]가 있다. 결국 참다못한 아테네인들은 8개월 만에 크리티아스를 축출했고, 그로부터 4년 후, 이러한 사태의 시발점으로 거론된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하고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진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직접민주제가 타락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보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23]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본인은 자신을 따라다녔던 청년들의 과두정치(寡頭政治) 체제를 몹시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뿐 아니라, 과두정에서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냥 쌩까고 집으로 돌아가는 등 반대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과두정이 조금만 오래 유지되었더라도, 그 일로 인해 소크라테스 본인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플라톤의 사상이라는 중론이 있지만) 과두정치 체제를 상당히 하등하고 부정적인 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의 시발점이라는 혐의는 부당한 면이 적잖이 있다.

어쨌든 표면상으로 소크라테스의 기소 혐의는, 아테네가 믿는 신을 우습게보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였다.[24] 황당해 보이지만, 크리티아스를 처단하고 내전의 장기화를 우려한 아테네에선 민주정을 회복하는 대신, 그동안 상대방에게 했던 잘잘못은 따지지 않기로 하는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진다. 당연히 여기엔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진짜 목적은 알카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정신적 스승을 처벌하려던 보복성 고발이었지만, 겉으로는 엉뚱한 걸 만들어 제시한 것이다.

사형 판결을 받은 재판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황당한 점이 많다. 참고로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었을 때의 죄목들은,

1.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했다.
2.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 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보다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했다.
3.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를 오도하게 했다.[25]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안 좋은 수를 두고 만다.[26]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쉴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27]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단지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28]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물건이다(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어그로 끌며--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악법도 법이다'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이에 대해서,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영빈관에서 밥 사라고 어그로 끌지 않고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이 계약론적 사고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강하게 신봉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압축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 자신의 철학 때문인데, 그는 철학이 유일한 인생의 이유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for a man is not worth living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이유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신과의 계약이며, 영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니,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고 도피를 하면 아테네와의 계약은 지키더라도, 신과의 계약을 어기는 행위가 되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단순히 배신자, 폭군의 스승이라는 것만으로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미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위대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풍자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교묘한 궤변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든 궤변론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도 그가 조롱했던 소피스트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 모든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설파하는 '보편적 진리'가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대한 권위로 변질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도한 것이다.

5. 평가[편집]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소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29]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노장(老庄)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30]를 달리는데, 이에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31]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론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그냥 나는 내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무지를 강조하기보다는, 박식하고 박력 있는 사나이의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각 종교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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