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영문

2018. 1. 5. 13:43

시간여행가 기억보관소/철거된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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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910년 직전의 모습
봉영이라는 글자 사이에 일본 황실 문장인 국화 문양이 박혀있다.
뒤에는 성벽이 헐어진 남대문(숭례문)

출처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FADs&articleno=9441316
냥이와 함께 우다다




증축 개편 이후

요시히토 친왕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세운 봉영문 뒤로 숭례문이 보인다.

1907년에 발간된 <황태자전하한국어도항기념사진첩>에 수록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을 기념하여 남대문 앞에 새로운 문이 세워졌는데, 봉영문(奉迎門)이었다.



남대문정거장에서 성문에 이르는 길에는 일본인거류민단에서 세운 봉영문이 남대문 안쪽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에서 세운 봉영문이 태자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 위에 대한 제국의 국기와 일본 국기가 있고, 문에도 일본의 합병을 강력하게 추진한 "일진회"가 쓰여 있다.



봉영문은 귀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이후 숭례문 주변을 시작으로 한양 성곽이 차례로 철거되기 시작하여 1909년 완료된다.



1910년 숭례문 앞에 위치하고 있던 남지를 매립한다.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이라 고쳐 부르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자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는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는데, 독립문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을 독립시켜줬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승전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 - “임진왜란 때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개선장군처럼 통과해서 서울을 함락한 숭례문”

<조선회고록>, 당업연구회출판사, 1915년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한국통감부를 개설하면서 숭례문 역시 풍전등화 격이 됐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 단체인 일본거류민회는 용산과 그 인근지역에 40만~50만명을 수용하는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골자는 서소문~수구문(광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에 십자대로를 조성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와 욱정(예장동·회현동 일대) 등 남산 북산록을 공원화 한다는 것이었다. 또 용산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이 용산 신도시 계획에 걸림돌이 된 것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그렇잖아도 일제는 도성 및 산성, 사찰 등의 각종 기념물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서울에서 발행된 한성신보 초대사장을 지낸 낭인 출신 아다치 겐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인 동화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배일 자료를 공급하는 기념물”이라면서 “기념물을 제거하는 것이 민심통일과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산성과 옛 사찰 등을 보면 ‘여기서 왜구를 격파했다’느니 하는 배일자료가 새겨져있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인이 이런 자료를 조석으로 접하면 조선인 동화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용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자 숭례문은 ‘타도 1순위’가 됐다. 당시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아예 “낡아빠진 남대문은 빨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포격으로 파괴하자”는 극단론까지 제기됐다. 하지만 제동을 건 자가 있었으니 바로 당시 한성신보사장이자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 였다.



‘숭례문 철거반대’를 외친 나카이의 주장은 깜짝 놀랄만 했다. 나카이는 ‘포격파괴’를 주장하던 하세가와에게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라면서 “당시의 건축물은 남대문(숭례문) 이외의 두 세가지 밖에 없으니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하세가와는 “임진왜란 때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 개선장군처럼 통과해서 서울을 함락한 숭례문”이라는 이야기에 뜻을 굽혔다(나카이의 <조선회고록>, 당업연구회출판사, 1915년). 대신 교통소통을 위해 숭례문의 좌우 도로를 확장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흥인지문 역시 가토 기요마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당시 간행물을 보면 숭례문·흥인지문 뿐 아니라 전주 풍남문은 “(정유재란 때)시마즈 유시히로와 가토 요시아키가 돌파한 곳”으로, 조령 제1관문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거했고, 아군(일본군)이 입성한 성문”으로 각각 설명했다.



또한 현무문·칠성문·보통문·모란대·을밀대·만수대 등 평양의 많은 성문과 누각 역시 청·일전쟁(1894~95년) 당시 일본군의 승전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잘 보존됐다.



예컨대 현무문은 “청·일전쟁 때 일등졸인 하라다 주키치가 비같은 탄환 아래 돌진해서 문을 연 곳”이고, 보통문 역시 “청·일전쟁 때 노쓰 미치쓰라의 사단 본대가 진격해서 평양을 점유한 곳”이라는 이유로 대접 받았다.



연광정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이 회담했던 곳”이어서 보존됐다.



숭례문과 흥인지문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숭례문 및 흥인지문을 문화재적, 혹은 미술사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승전문’이었기에 보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전승기록과 아무런 연관이 없던 돈의문 등은 교통에도 걸림돌이고 조선인의 배일감정을 부추길 뿐이라는 이유로 철거됐던 것이다.(오다 히데하루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의 고적조사와 성곽정책’, 서울대 석사논문, 2002년)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이씨조선은 청의 책봉체제에서 해방된다.



1895년 3월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중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조약직전 2월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정부에 청의 종주권을 상징하는 1)연호를 바꿀 것 2) 송파에 있는 쳉제공덕비를 쓰러뜨리고, 3) 무악재에 있는 영은문을 제거하고 4) 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과 홍제원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논의한 조선 내각에서는 구파와 신파로 대립했는데 2) 3)에 대해서는 구파가 동의했지만 연호는 이미 청국의 연호를 폐기하고 개국 몇년이라고 칭하게 된 이상 새로 연호를 세울 필요가 없으며, 또한 모화관. 홍제원의 두 건물은 공연히 때려 부술필요가 없으며, 그 명칭을 바꾸어 다른 건물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논의를 펴면서 동의 하지 않아 끝내 한바탕의 문제가 되었다.



영은문은 1985년 3월에 철거되었다. 독립협회가 조직되기 전이므로 독립협회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일본의 요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1896년 11월 21일은 독립문의 정초식 날짜이지, 청에대한 속국 상징인 영은문이 헐린 시점은 1895년 3월이었다.



중국을 섬기던 문이 헐린 것은 고려, 조선 1000년을 지배해 온 세계관, 곧 만물이 중국의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중화사상(Sinocentrism)이 무너지고, 일본과 서양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출처 : 일본인 거류민단에서 세운 봉영문(奉迎門), 1907년
현대사스토리텔러
https://m.blog.naver.com/telience92/22206042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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