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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통치행정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


1926년에 완공되었다.


아시아 최대의 근대건축물이자 대표적인 오리엔탈-르네상스형 석조건축물.




광복 이후에는 중앙 정부기관이라는 뜻의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부의 중앙 행정 기관과 의회당으로 활용되었고, 


해체 당시에는 최대 규모의 박물관으로 활용 중이었으나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권에 의해 철거되었다.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저 멀리 청와대가 보인다. 현재는 이 위치에 흥례문이 재건되었다.





독립기념관에 놓여진 첨탑

일제의 잔재라며 부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1945년 9월 9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여 일장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다.



이로써 미 군정이 시작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선거위원회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 사상 최초의 제헌국회 개원식이 열린 중앙청 홀.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이 열린 중앙청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반대 의견을 묵살하여 건국의 장 없애버렸다.


이로부터 약 1년 10개월 후...






1950년 6월 28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 발발 3일 뒤 북한에게 수도 서울이 함락되어 점령당한 중앙청에 인공기가 걸렸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해병대 장병들의 태극기 게양 사진


UN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1950년 9월 29일 중앙청 메인홀에서 거행된 서울 탈환 환도식전에서 축사 겸 기도문을 낭독중인 맥아더 원수. 

오른쪽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겸 국회의장 (대법원장은 김병로가 맡았다)


역사적 가치,




중앙홀 북측

1912년부터 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하였으나 1914년에 기초설계만 남긴채 사망하였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인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했다.

중앙홀 남측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에서 3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최신 기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장식은 유럽에서 수입해와 만든 호화판 건물이기도 했다.

천장 유리화

1916년에 시작된 공사는 처음에는 5년의 시간과 300만엔의 비용이 예상되었지만, 결국 1926년에 완성되어 10년이 걸렸고 돈은 675만 1,982엔이 소요되었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2배씩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일본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00만 명이 해마다 투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휘장

중앙회의실

국무회의실





건물의 기본 골격은 당시 최신재료였던 철근 콘크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외부의 치장은 과거 르네상스시대 석조건축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서양의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처음에 설계하던 독일인 건축가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이다. 


이후 일본인 건축가가 인계받아 설계가 완성되었지만,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서구의 건축 양식이 근대 동아시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있다.



예술적 특히 건축학적 가치 때문에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붙어 지금도 논란이 이는데


1950년대 복구 중인 중앙청


현재 일본의 국회의사당 건물과 흡사하다.



뒤의 푸른 지붕 건물은 경무대 총독 관저로, 노태우 이전까지 청와대 구 관사로 사용되었으나 

노태우는 이 건물을 철거하였고, 지금의 청와대를 지었다. 

광화문 앞의 붉은 건물은 옛 경기도청 건물이다.



대만총독부 청사와


식민지 만주국의 행정기관 국무원 청사,



그리고 영국의 자금수탈 업무를 맡은 상하이 은행도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이슬람은 톨릭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사용했었던 것을 살펴 보면


대한민국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했었던 이 중앙청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중앙청에서 이전한 정부서울청사이다.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혈의 위치에 건설되었고, 뒤의 경복궁을 가려버리게 되어서

민족의 혼과 정기를 끊는다는 말이 있긴 한데,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뿐,


가장 중요한건 광화문과 흥례문을 이전하여 그 위에다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수진 않았다는것이 불행중 다행... 근데 이러면 우리도 옮겼어야하는거 아닌가?





이런 사례가 있다.


홍콩은 영국이 식민통치시절 세운 건물인 머레이 하우스를 분해한 뒤 이전시켜 재조립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례도 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베를린 궁전



동독을 점령한 소련 공산당은 위의 유서깊은 문화유산을 폭파시키고 공화국 청사를 짓는다.


통일 후 독일 연방 정부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베를린 궁전을 재건한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스탈린은 이를 폭파시키고 소비에트 혁명 대성전을 건설한다.


그러나 독소 전쟁으로 인해 공사 중 폭격을 맞아 재건되지 못하였고, 종전 후 스탈린은 사망한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면서 러시아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재건한다.







조선총독부 휘장


朝鮮總督府


문양에는 거느릴 총 자가 総이라 쓰여 있는데, 이는 정통 한자인 번체를 일본에서 간소화 한 글자인 신자체이다.

중국에서 간략화 시킨 문자는 간화자 라고한다.




中央廳

미 군정 당시 Capital hall이라 쓰이던 명칭을 직역한 단어



일제는 조선의 상징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다 식민통치의 상징을 세웠다.



북궐도. 전부 복원된 경복궁의 완전체이다.


현재는 이정도밖에 남아있지가 않다.










故 마광수 교수의 시


물론 흥선대원군이 이미 망조가 든 빈곤한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지은 건물이긴 하나...


애초에 원래 있었던 왕궁을 재건한 것이라 이건 논란의 여지가 안된다.





노비를 동원해 만들었으니 노예들로 하여금 짓게 한 피라미드와 비슷한 경우







게다가 日帝는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어 오물로 더럽혀지게끔 능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라가 약하면 이런 능욕을 당한다.



일본의 천황궁에서 일뽕 한국인과 극우 일본인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야스쿠니 신사에다가 원폭 실험을 하고 난 뒤에 총독부를 재건하면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재건 할 석재가 이미...



태평양 전쟁의 전범국인 일본제국은 미국의 핵무기를 맛본 후 항복하였다. 이로써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원자폭탄을 맞은 원폭 돔 히로시마 상업전시관. 현재는 평화기념관이다.



일부 복원된 경복궁의 전경. 사실 조선 후기 쇄국정책으로 나라를 망국으로 만든 흥선대원군이 국력이 더 쇠퇴할 정도로 무리하게 복원하려고 했었다.



휴전 직후와 현재의 세종로





중앙청 옆 뜰에 목련꽃이 피었다.


이승만 초대 정부 때부터 문제를 제기하였고

합의적 대안으로 이전을 검토했었다.



중앙청 서측 광장에 있었던 장미원, 후생관이 새로 생기면서 축소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거목이라는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적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역사 바로세우기를 외치며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문명을 파괴하였다.


일제와 독재를 청산한다는 미명 아래 국가의 얼굴을 부순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태어난 곳이 없다



"일본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역사 망언을 날리는 일본에 일침을 가하며 파괴한 이 행동은  매우 통쾌하고 시원하긴 한데...


이로 인해 빡친 일본 정재계에서 자본을 철수하여 IMF 외환위기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이후 일본에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단칼에 거절 당했다...



국가부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국 기업을 해외자본에 매도하게 되었다.


이 급한 불을 끄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수도 있겠으나


중요한 건 이 급한 불이 나게 된 도화선 시발점이 총독부 파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앙청을 허물어버린 행위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취업난과 경기침체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경제불황은 고도성장 뒤에 오는 것이 맞지만... 이를 가속화시키고 극심하게 한 것






5·16 군사정변 직후, 1961년 5월 16일 오전 8~9시경 중앙청 앞의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좌측)과 차지철 대위(우측)



1967년 7월 1일 오늘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이 곳에서 열렸다. 

이 사례는 포퓰리즘의 폐해이기도 한데, 잘 생각해보자.


결국 이 건물을 지은 건 착취당하던 우리의 선조들이다.



이 외에도 나라에 중대한 거사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은 이 건물과 함께해왔다.


9ㆍ28 수복기념 중앙청 국기게양식 재현



『순수 건물철거비로 당시 돈으로 약 47억원이 소요되었으며, 이 때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자료, 모형제작을 합쳐 117억원이 소요되었다. 



1953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 

처음에는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보존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2천억원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어 무산되었다. 철거 결정이 내려진 이후 일본 정부에서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가, 이 발언에 열받은 김영삼이 바로 다음 날 폭파 해 버리고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70%를 넘었다 카더라.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정책으로 인해 90%를 넘은 적도 있으니, 아주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1950년대 미 상원의원 윌리엄 놀랜드를 환영하는 표어가 걸린 중앙청

아무튼, 독립기념관의 건축과 조선총독부로 쓰인 중앙청의 해체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건축사적으로 의미있는 반일/극일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중앙청은 일제강점 86년, 건설된 지 70년(건설 시작부터는 80년)만에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로서 존속된 건 19년, 그 이후 중앙청으로서 쓰인건 51년 만이었다. 』

-출처: 리그베다위키(엔젤하이로-엔하위키/나무위키)




빙산의 일각. 이거 하나만 놓고 봐도 초대형 항공모함 2척과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수십척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2천억원이 엄청난 예산인가? 방산비리로 수십조 삥땅쳐먹는 나라에서...?

그당시 화폐가치의 100배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오랜 기간을 잡아 이전 공사를 하면 충분하다

20조 원이 든다고 하더라도, 10년을 기한으로 잡으면 연 2조원이면 가능


2017년 기준 한국의 국가예산은 400.7조원 (2016년 본예산 대비 3.7%증가, +14.3조원)


구분예산증감율구분예산증감율
구분예산증감율구분예산증감율

보건·복지·노동

130조원

5.3 ↑

SOC

21.8조원

8.2 ↓

교육

56.4조원

6.1 ↑

농림·수산·식품

19.5조원

0.6 ↑

문화·체육·관광

7.1조원

6.9 ↑

국방

40.3조원

4.0 ↑

환경

6.9조원

0.1 ↑

외교·통일

4.6조원

1.5 ↓

R&D

19.4조원

1.8 ↑

공공질서·안전

18조원

3.1 ↑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5.9조원

2.0 ↓

일반·지방행정

63.9조원

7.4 ↑


출처
 
기획재정부


대한민국이 태어난 장소인데, 연 0.5%의 예산을 투자하면 되지 않았나


다음의 건물들은 현재 남아있는 일제시대 건축물들이다

이러한 이유 없이 단순히 역사 바로잡기의 일환이었다고 총독부 건물 철거를 칭송한다면

아래의 건물들 또한 철거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역으로 사용되었던 서울역 구 역사

대한의원, 일본 건축소 기사 야바시 겐키치가 설계하였다. 총독부의원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을 거쳐 현재 서울대병원 의학박물관

경성부청이었던 서울시청 구 청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기습 철거를 감행하였으나 문화재청에 적발되어 실패하였다. 現 서울도서관

일제 수탈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조선은행으로 사용된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천일은행 광통관. 현재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근대 건축물로는 드물게 본래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저축은행. 제일은행 본사로 쓰이다가 스탠다드 차타드에 매각되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있는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이전까지 공업전습소로 잘못 알려져왔던 건물. 

경복궁 관리소. 현재 경복궁 부지 안에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유일한 건물이다.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창고로 쓰였다.

대법원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쳔된 한성재판소. 현재는 껍데기만 남겨져 있다.

서대문 형무소. 수많은 애국열사 독립투사들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국의 알카트래즈 교도소 아니 아우슈비츠 수용소

삼성가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는 미쓰코시 경성점 건물. 일본인에게만 물건을 팔던 차별의 상징이다.


그 이전에 서울대학교를 일본이 세웠으니 이것도 싸그리 없애버려야 하는거 아닌가?

물론 일제가 한 만행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천인공노할 짓이었지만,


아픈 과거 또한 잊어서는 안 될 우리 민족의 역사다.


반대를 위한 반대, 정신승리는 이쯤에서 그만 두도록 하고



원스턴 처칠, 영국 수상 

신채호, 독립운동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한번이라도 곰곰히 생각해봤으면 한다.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시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과거의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재의 문제를 해쳐나가 
미래를 설계한다.

역사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저 일본 제국주의 만행의 상징을 후손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었다면


교과서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와닿을 거라 생각한다.



김영삼은 단지 자신의 임기 때 총독부를 없애 경복궁을 복원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경복궁은 복원되어야만 한다.



경복궁과 중앙청은 물과 기름과도 같은 관계이기에, 둘 다 이 나라의 중심에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매우 성급했고, 시기상조였다.


이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라도 다른 곳에 이전되어야만 했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다.


이것의 가치는 절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단순히 부숴버린다고 치욕적인 역사가 청산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없애버림으로써 일제의 잔재 뿐만 아니라 


이 땅 우리 겨레의 역사까지 지워버렸다.















































기타 내부 사진 및 별관 등 부속 건물





1993년 1월 촬영한 내부 사진. 

외부에 있는 석재 구조물과 금속 외장 그리고 실내 장식물들, 미술품 등이 높은 가치를 띄고 있다.










내부 사진 출처 : 향수병 환자의 보관소

http://egloos.zum.com/epoque/v/4112102



중앙 홀

위층 로비

국무회의실

중앙회의실

총독실 및 연회장

국무총리실

장관실

중앙기자실

당직총사령실

총무처 총무과

중앙청 구내우체국

한국은행 국고대리점


             본관 좌측에 소재한 제1별관, 문화공보부 및 부속 기관이 사용해오다 중앙청사 이전 후 철거되었다.
             환도 직후인 1953년부터 본관이 수리될 때까지 임시 국무회의실이 2층에 입주했던 내력도 있었다.

           제1별관 후방의 정부 기록물 보존소, 일제시대엔 총독부 학무국이 입주한 곳으로 86년 봄에 철거했다.
           본래 일본식 기와 지붕이 씌워져 1층이 추가되었으나, 휴전 후 해체시켜 콘크리트로 땜질한 것이다.

중앙청 서측 광장에 소재한 청사 기관실과 온실, 조경에 공급될 화초를 집중 재배시키던 장소였다.

중앙청 근무 공무원들의 편의 시설로 1978년 신축된 후생관 전경,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들어섰다.

청와대 옥상에서부터 바라본 중앙청 전경, 돔 양측으로 새마을 운동기와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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