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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오키나와에서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 소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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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 직전 징집된 철혈근황대 학도병들



일본군은 오키나와 민간인 32000여명과 14~16세의 1780여명의 학도병들을 "철혈근황대"라는 이름으로 징집했다.

(명목상 자원제였으나, 사실상 징집이였으며 이들의 전사율은 50퍼센트가 넘는다.)



사실 원자폭탄 2발을 맞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이른바 "본토결전"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오키나와에서만 실제로 소년병 운용이 있었던 것이지



원자폭탄이 제때 완성되지 않고 "몰락 작전"으로 미군의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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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배포된 죽창과 식칼, 낫 등을 이용해 기습공격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국민 항전 필휴" 소책자)



갓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여고생 사무라이 부대들이 미군을 맞았을 예정이였다.





독일, 나치의 경우는 다음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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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독일군 소년병과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미군 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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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 독일군 소년병

(2급 철십자 훈장은 독일의 패배가 목전까지 다가온 시점에서 깡통에 담겨서 뿌려지다시피 남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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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맞지 않는 롱코트를 입고 미군에게 몸수색을 받고 있는 독일군 소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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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돌격대 총사령관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과 악수하는 독일군 소년병





나치 독일의 소년병 운용은 일본군보다도 더욱 체계적이고 광범위했다.



초기엔 곧 성인이 되는 히틀러 유겐트(소년단) 단원들을 동원한 "히틀러 유겐트 사단"이 조직되었고, 독일이 점점 수세에 몰려갈수록 소년병 징집은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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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히틀러 유겐트(소년단) 소속으로 방공포대에서 근무한적 있을 정도였다.


출처: 군사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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