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성전기 본사 사옥은 고종황제의 명으로 1901년에 건축된다. 서울 종로2가에 있던 사옥 


현 한국전력의 모태가 된 기업이다.


남근을 형상화한 시계탑이 인상적이다.


일제강점기 배경 창작물에서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서고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고등계 형사)들은 백이면 백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경우 허구한 날 털리는 곳이기도 하다(...). <각시탈>에서는 단독침입한 각시탈에 의해 몇 번이고 털리며, 무기고까지 2번이나 털리면서 호구인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자는 단 한번 갈렸을 뿐인 신기한 곳.


왜냐하면 한 영웅 독립운동가에 의해 실제로 털렸기 때문...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 의사의 폭탄투척으로 이후 경성복심법원이자 한때 대한제국의 최고 법원이었던 평리원이 있던 건물을 쓰게 되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지금까지도 박물관으로 남아있지만, 당시의 종로경찰서는 남아있지 않고 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구 평리원 청사 모두 헐리고 만다.



독립투사인 故 김상옥 열사의 활약상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5일이 지난 1월 17일에 일본 경찰은 투탄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다. 그러던 중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이마세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고봉근의 행랑방에 들어 있는 천하의 개쌍년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였다.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다.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산을 내려왔다.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여기서 동상도 치료하면서 앞으로의 거사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날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400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일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방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 젖히다 가장 먼저 사살당했으며, 벽장 담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3시간 반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머리에 대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는데,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한다.[ㅇ] 이 때 자결한 총알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 된다... 역시 신념은 총알로 부숴지지 않는다. 구리다 경부가 사살되고 일경 16명이 사상하였다.

일본 철혈통치의 핵심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천여명의 일본 군경에 혼자 맞서 총격전을 벌일 정도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게도 대중들에게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중매체에서도 별로 다뤄지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