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최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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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지켰건만…허물어지기만 기다리는 듯”
근대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 ‘최부잣집’이 헐릴 위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최부자’ 후손 최순(77) 씨의 평생을 건 사투 때문이다. 지난 50여 년간 ‘최부잣집’ 소유권 문제를 놓고 홀로 싸워 온 최 씨. 평생에 걸친 싸움으로 가옥만은 보전하게 됐지만, 아직 최 씨가 넘어야 할 큰 산이 남았다.
최 씨는 ‘최부잣집’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관리·보존하기를 원한다. 남구 사동에 위치한 ‘최부잣집’은 학생독립운동가의 요람, ‘흥학관’을 건립한 최명구 선생의 아들인 만석꾼 최상현 선생이 1942년 지은 것으로 규모와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통한옥, 일본식,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재된 독특한 근대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 지정이라는 최 씨의 마지막 바람마저 큰 산에 가로막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최부잣집의 부지는 전남대 소유, 하나 남아 있는 안채는 최 순 씨 소유인데, 땅 소유자인 전남대가 등록문화재 지정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40년 음악교사로 번 돈, 소송위해 쏟아 부어
가옥을 지키기 위해 전남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수십 차례 탄원서를 제출하는 사이 최 씨는 늙고 병들었다. 최부잣집 또한 관리사각에 놓여 방치된 동안 일부 훼손이 진행 중이다. 생채기만 남은 최 씨와 최부잣집은 70평생을 같이 한 슬픈 동반자인 셈이다.
“이 집(최부잣집)이 지어졌을 당시 내 나이는 여섯 살쯤 됐을 거요. 할아버지(최상현)가 우리 아버지(성숙 씨)를 위해 집을 지어준 거지요. 당시 할아버지가 광주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던 터라 이렇게 대궐 같이 집을 지었다고 해요. 지금은 안채하고 화장실만 남았지만 무려 1800평(5940㎡) 대지에 연못, 정원, 11칸의 문간채, 안채 뒤편에 양옥집까지 있었으니까.”
최순 씨는 `최승효 가옥’이라 불리는 현재 양림동 최상현 선생의 또 다른 가옥에 거주하다 최부잣집으로 입주했다. 그리고 8년 뒤 한국전쟁을 맞아 피난을 떠난 몇개월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때까지 최부잣집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로 대학을 갔어. 피아노를 전공했거든.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유학 준비를 했지요. 음악공부를 계속하고 싶었고, 식구들과도 이야기가 다 됐었고. 근데 서울에 사시던 고모들이 하루라도 빨리 광주 집(최부잣집)으로 내려가라고 야단이야. 집이 넘어가게 생겼다고, 집을 지킬 사람은 장녀인 네가 할 일이라면서.”
결국 최 씨는 유학길을 포기하고 광주 집, 최부잣집으로 돌아왔다. 최 씨의 아버지 성숙 씨가 이른 나이에 작고하면서 최부잣집에는 홀로 되신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었지만, 생계의 어려움 등 가세가 기울면서 복잡한 문제가 얽히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 씨 가문과 전혀 상관없는 손 모 씨에게 최부잣집이 넘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가 서울에서 공부하던 사이 일어난 일이라 이후 자초지종을 듣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했어요. 집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가 그렇게 원망스럽대요. 집을 되찾아야 겠다는 일념 하나였어요.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았지요. 광주에서 멀리 떨어진 전남 지역의 섬까지 출근하면서 모은 돈이 좀 됐어요. 그나마 그 돈도 없었으면 어땠을 거야.”
▶땅 주인 전남대 횡포 속 간신히 되찾은 본채
최 씨는 20대 후반부터 40여 년간 교직생활에 몸담으면서 모은 돈으로 최부잣집을 지켰다. 전남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소유권 문제로 법적 다툼을 벌일 때 요긴하게 쓰인 돈이었다. 소송 끝에 전남대로부터 안채 소유권을 돌려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이 가정을 꾸린 최 씨가 생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옥에 세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한 20, 30년 전쯤 2년 간 안채에 주점을 내준 적이 있지요. 당시 식구들은 아래채에 살면서 지독하게 힘든 시절을 났어요. 그러다 다시 안채로 들어왔고, 1989년부터는 내가 직접 안채 2층에다 독서실을 차렸어. `청원독서실’이라고.”
최부잣집 2층에는 아직도 `청원독서실’ 간판이 붙어있다. 책상이며 의자며 독서실을 운영할 당시 시설물도 여전히 2층 실내에 남아 있다. 하지만 정작 최부잣집의 역사를 간직한 시설물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특히 최부잣집을 에워 싼 돌담과 장대한 솟을대문, 문간채들이 땅 소유주 전남대에 의해 헐렸다.
“전남대는 자기네 땅이라는 거야.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불과 몇 년 전 일이라 기억이 생생해. 솟을대문의 경우 전남대 교수들도 와서 뜯어 말렸거든“ 이것(솟을대문)은 허물면 안 된다고. 그런데 결국 이렇게 다 허물고 본채만 덩그러니 남게 된 거요.”
전남대는 2005년 최부잣집 돌담을 허물고 벽돌담을 쌓았다. 간신히 돌려받은 안채까지 손을 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최 씨는 전남대를 상대로 손괴죄 소송을 걸고, 소유권 분쟁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2011년엔가 조달청에서 유휴지로 남아있는 국유지 환수조치를 권고한 적이 있었나 보더라고. 전남대 재무팀에서 집에 찾아와서 그래, `전남대에 집(최부잣집 본채)을 세 내줄 수 있겠냐.’ 가져온 선물도 도로 보냈어. 절대 그럴 수 없는 거지. 집을 안 허물고 용지를 쓰겠다는 건데, 그 말을 어찌 믿으리오.”
▶마지막 바람 “등록문화재 지정”도 불발
최 씨는 최부잣집을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등록문화재’ 지정을 생각해냈다. 최근 등록문화재에 대해 알게 된 뒤로 서류까지 만들어 2013년 등록문화재 등록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전남대의 거절로 인해 이는 불발되고 말았다.
“작년 광주시 공무원의 도움으로 등록문화재 등록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가지고 전남대를 찾아갔지요. 마지막 땅 소유주인 전남대 동의가 필요했는데 전남대는 이를 거절했소. 무슨 꿍꿍이인지. 집이 허물어지기만 바라는 사람들 같았다니까.”
등록문화재는 보존가치가 높아 엄격히 규제하는 지정문화재와 달리, 건축물이 현재도 소유자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완조치를 두는 것으로 근대건축물을 보존 및 활용할 수 있도록 문화재로 등록한 것을 말한다.
현재 최 씨는 최부잣집의 `등록문화재’ 등록을 가로막는 전남대와 서류제작 외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는 광주시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부잣집에서 마을잔치를 벌여 가옥의 가치를 알린 마을기업 꿈꾸는 거북이의 구용기 씨를 비롯해 많은 주민들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최부잣집은 옛 위용을 나날이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